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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May 14. 2024

여기 대학원생 한 명 추가요

고된 대학원 생활을 함께할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해

  직장 생활과 대학원 생활이 얼추 균형을 이루었을 때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평소 전화도, 카톡도 잘 주고받지 않던 후배였다. 그녀의 이름이 폰 화면에 뜨는 걸 보고 반가움 보다 "뭐지?" 의아한 생각이 먼저 앞섰지만 한편으로 잘 지내나 싶은 반가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무슨 일로 전화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핸드폰을 바로 잡아 들었다.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오랜만의 대화라 말이 편하게 나오지 않았다. 마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처럼 어색한 상냥함이 묻어난 말투로 그녀를 대했다. 


"언니~!"

"어~ 그래! OO아,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일로 전화를 다하고"

 "언니, 진짜 오랜만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저 이번 상반기에 대학원 접수하려고 하는데요. 근데 자기소개서에 뭘 써야 해요? 지원 동기는 어떻게든 적겠는데 학업계획에서 막혀서...... 무슨 계획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서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내 주변에 대학원을 생각을 하는 애가 다 있었구나. 박사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후배의 말에 지금껏 툭하면 공부 그만두고 떠나야 하나, 더 늦기 전에 다른 일 찾아야 하나 이런저런 번민에 휩싸이며 힘들어했던 지난날이 관자놀이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비집으며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대학원' 말만 들어도 혀를 내두르는 반응들을 지금까지 숱하게 봤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이 시간을 투자하면서 이유 없는 불안과 막막함과 싸우는 나의 모습을 본 후배라면, 대학원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런데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구나. 심지어 박사를 말이다. 등록금이며 시간이며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현실을 잘 알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언니 박사 때 준비 어떻게 하셨나 해서요."

"아, 벌써 대학원 지원 할 시즌이구나. 시간 왜 이렇게 빨리 지나니. 나도 요새 학교 일 때문에 정신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네...... 근데 너 박사 과정 다니려고? 왜?"

"어...... 음...... 하하..... 그게, 석사 졸업하고 학교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여하튼, 부모님도 하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박사 지원 공고를 봐서 이번에 지원해 보려고요."

"그렇구나, 생각이 있으면 한 번 해보는 것도 뭐 나쁘지 않지. 그런데 네가 박사 다닐 생각 진짜 상상도 못 했어."

 "저도 제가 박사 과정을 생각하게 될지 몰랐어요. 언니. "


  신선한 당혹감이란 게 이런 건가. 반가움과 놀람의 감정이 교차했다. 같이 대학원에 다닐 후배가 생긴다는 기대감이 마음속 어딘가에 피어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후배는 아직 서류를 접수하기는커녕 자기소개서 한 줄도 쓰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대학원에 함께 다니고 있는 것 같은 상상과 설렘이 현실을 먼저 저만치 앞서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어졌다. 하지만 극내성적인 성향인 후배가 주변의 권유에 떠밀려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대학원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과 걱정이 스쳤다.


"그니까, 너 들어오면 참 좋을 텐데. 근데 부모님한테 떠밀리듯이 들어온 건 아니지? 마음에 없는 길이면 안 하는 게 좋을 건데."

"아, 그건 아니에요. 뭐...... 부모님께서 말씀을 아예 안 하신 건 아니긴 한데, 지금 다른 공부도 같이 하고 있는 중이라 이 참에 같이 병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다행히 후배는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다행이네' 나는 살짝 마음이 놓이면서 잠시 놓쳤던 자기소개서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렇구나. 아, 그리고 학업 계획은 크게 잘 써야 될 필요는 없어."

"아, 그래요? 그래도...... 중요한 항목 아니에요?"

"계획이란 게 지금 신경 써서 작성한다고 해서 그대로 논문 주제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서 그래. 논문 작성할 때 되면 또 주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고민의 여지를 남겨 놓는 게 좋지."

"아...... 맞네요. 하하."

"첫 시작은 대강 하는 게 유리해. 복잡하면 더 못 써......"


  '대충'쓰라는 말. 내 일 아니라고 성의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다. 잘하려고 하면 더 막막하고 될 일도 더 안되고, 결론은 스트레스만 받다 멈추게 된다.  실제로 논문을 잘 쓰고자 마음먹었던 분들 중에 시작도 하지 못하고 10년 넘게 '수업 귀신'으로 남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대학원생분들을 적잖게 봤다. 못하면 못쓰는 대로  대충 발로 쓰고, 손으로 쓰고, 마음으로 써보고, 이성적으로도 접근해 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수정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가닥이 잡혀나가는 걸 알기에, 후배가 대학원 합격 문턱을 넘기 전부터 겁을 먹지 않았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으로 전한 조언이었다.   


"그런데 나도 박사 과정 들어온 지 벌써 2년이나 지나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 확실한 합격 비법 같은 건 없고, 너 석사 논문 주제 관련해서 앞으로도 연구하겠다고 최대한 길게 늘여서 써. 어차피 교수님들이 자기소개서 잘 안 봐. 그래도 진솔하게 작성하고 짧은 글은 최대한 지양하는 게 좋아."

"씁, 하...... 글 적는 거에서 이렇게 막히면 면접 때는 어떻게 말해야 돼요? 전혀 종 잡히지 않아요."

"면접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뭐 공부할지, 관심 있는 분야만 좀 가닥이 잡혀있다면 그거 바탕으로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혹시나 교수님이 영어 단락 가져와서 앞에서 해석해 보라고 내밀면 운에 맡기는 게 마음에 더 편할 듯."


  혼자 다니는 대학원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최대한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이 무엇인지 확신은 없었다. 다만, 면접위원으로 들어오시는 교수님들이 학업계획서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작성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 외에 별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함께하고픈 마음,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뒤섰여 중구난방식으로 내뱉은 별 영양가 없는 나의 조언 뒤로, 전화 너머 머쓱하게 웃는 후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언니 그래도 고마워요. 그런데 기대는 마세요,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떨어질 수도 있고 하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참고해서 준비해 볼게요."

"나도 알지. 떨어지면 후반기나, 내년 상반기에 다시 지원하면 되지. 다른 분들 중에도 몇 번 떨어진 분들도 있는데 결국 입학하셨어."

"네~ 그럼 한 번 해볼게요."

"그래, OO아. 조만간 밥이나 같이 먹자. 부담 가질 필요 전혀 없어, 마음 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하하. 그런가요?"

"그럼, 좋은 결과 있길 바라. 분명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결국 후배는 올해 상반기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사실 30분가량의 대화 속에 잘 준비해 보려는 후배의 부담이 짙게 깔려있었지만,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다. 이상하게도 분명 후배는 합격할 것 같은 느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 신기하면서도 너무 감사했다. 


  함께 공부와 논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면적인 풍요로움을 함께 공유할 사람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많은 이도 아닌 단 한 명이면 충분할 일이다. 후배의 대학원 합격은 지금껏 홀로 대학원에 상주한 보답으로 받은 선물과도 같았다. 이제 앞으로의 길에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고 결국에는 함께 학사모를 공중으로 던지며, 꽃을 드는 결말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남아있을 뿐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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