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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Y May 19. 2024

저, 잠시 다른 일 좀 하고 올게요

우울한 여름의 종말을 선언하다

"제 인생에 공부는 대학교에서 끝이에요. “  

   

  대학원 수업 발표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내뱉은 후배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얇은 나뭇잎이 팔락거리며 바닥으로 조용히 낙하하는 움직임 같이 마음에 뭔가가 일렁였다. 살포시, 천천히, 부드럽게 떨어지는 흐름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잠깐이었지만 뭔가에 휘둘려 감긴 것 같은 서늘함과 찝찝함이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해 버렸다. 그렇다고 일부러 환하게 웃지도 않았고 너무 절망스러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귀에 들어왔을 뿐인데 나갈 출구를 찾지 못한 문장 한 줄을 무의식이 껴안은 게 문제였다. 


  마음이 엉망진창이면 무의식은 대책이 없어진다. 여기저기 내민 손들은 현실을, 기억을 그럴듯한 서사로 바꾸어버리는 조작의 힘을 발휘하곤 한다. 왜곡은 부정적 사고가 판을 치는 정신세계와 깊은 우정을 맺고 있어서 불확실과 부담감이랑 합작을 이루면 조작의 힘은 더욱 거세진다. 그러면 애초에 상대가 의도했던 말의 의미가 온전한 상태로 귀에 도달할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별 아닌 대사 한 줄 한 줄이 무슨 닭고기 가시가 되어 목구멍에 조각조각 걸려있는 것 같은 불쾌감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쯤 되니까 속 안에 드리운 조용한 의구심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나란 사람이 대학원에 들어올 만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수준에 도달한 게 분명하다. 울면서 '이건 아니다’는 위기감이 나를 덮쳤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우울증 환자가 되는 결말을 피하지 못할 게 뻔했다. 나는 정신적 마지노선에 서 있었다. 지겹게도 우울한 여름의 종말을 선언하고 싶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을 밀어내는, 땅거미에 처박혀 있는 마음과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생동감 넘치게는 아니라도, 남들처럼 생활하는 생명체의 수준에 도달하고 싶었다. 멈추자. 촉수가 흔들린다. 흐트러진 혼돈에서 점차 정렬을 가다듬어가는 신경들의 배열 사이에 불필요한 뭔가를 가지치기했다. 전환점에서 U턴을 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한 뼘 내밀며 가려던 발을 도로 제자리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의 생명력이 완전히 죽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걸어 나갈 그 추진력, 그 동력을 다른 일에 투자하는 일이 가능했다. 다음 학기는 곧바로 사라졌다. 충동적으로 내던진 종이 한 장이 자퇴서가 될지, 휴학 신청서가 될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다 필요 없었고, 돈과 경험 그거면 되었다. 햇빛이 창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기 전에, 또다시 울음으로 도배된 새벽을 맞이하기 전에, 선택해야 했다. 당장 멀리 떠날 엄두는 나지 않았고, 가장 가깝고 익숙한 장소에서 새 시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곧장 학교 홈페이지의 ‘공고채용’ 메뉴에 들어갔다. 어느 부서든 다 상관없이 작은 조교직이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너무나 감사할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게시물 스크롤을 내리다가 ‘학생서비스팀 조교 모집 공고’에 눈이 꽂혔다. 서비스팀이라, 무슨 서비스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한 번도 갈 일이 없었던 학교 내 부서 중 한 곳이었다. 모르면 궁금해지는 법이다. 내가 지옥이면 다른 세상이 유토피아처럼 보이고, 지금 하는 일이 힘들 때 다른 일이 쉬워 보이기도 한다. 바다를 청보리밭으로 알고 힘차게 날아가는 어여쁜 날갯짓은 한 부서의 일원이 되고자 원했던 나의 기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생 몸담을 일이 없을 거라 여겼었던 ‘사람 상대하는 업’에 도전해 보고자 마음을 정하고 나서는 카페에 가서 반나절을 신청서 작성에 매달렸다. 


  학교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과 인문계 학과 출신이라 연구조교는 할 수 없다 쳐도, 학사조교와 교육조교를 합쳐 조교 경력만 3년이라는 경험을 어필하는 것 외에 달리 적을 내용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작은 자리였지만 가볍지 않았던 자리. 참 순수하게 간절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저 자리에 오르면 다 될 것 같은 단순한 심정으로 공고에 기입되어 있는 메일 주소로 신청서를 보내기 직전, 청보리밭이라 착각하고 날아가는 나비의 날갯짓은 힘차게 탄력을 받고 있었다. 대학원에 돌아가지 않는 해방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조용히 혼자 속삭였다. 


"저, 잠시 다른 일 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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