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모순적 자아
집순이에 가까운 귀차니스트이지만, 여행을 좋아한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각종 콘텐츠에 피로하지만, 근사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건 세상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지만, 타인의 칭찬이 고프다. 누구나 감탄할만한 능력이 없다면 솔직한 게 최고라 생각하지만, 남 앞에선 있는 것 없는 것 긁어모아 나를 꾸미게 된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아끼며 살 수 있다 생각하지만 절약하지 못 하는 타입이라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한다. 이만하면 세상과 타협할 때도 됐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지만, 불합리한 것엔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시작이 반이라 생각하지만,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적당한 명분과 조건을 갖출 때까지 시작을 미룬다 등등. 그 밖에도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에 관해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첫 유럽 (배낭)여행
여행에 그다지 흥미가 없던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얘기 끝에 남들도 한 번쯤은 다 간다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됐다. 우리는 당장 싸이월드 카페를 개설했다. 회원 수가 달랑 4명인 유럽 배낭 여행 카페에는 한참이나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새 게시물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로 각자가 찾은 유럽 3성급 호텔이었다. 세계 각국의 배낭여행자가 모여드는 호스텔, 그것도 남녀가 한방에서 묵는 도미토리는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합리적이면서(싸면서) 깔끔하고(더럽지는 않고) 널찍한(4인이 발 뻗고 누울 만한) 호텔 방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의 일은 두꺼운 가이드북에 맡긴 채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여정은 다이내믹했다. 2주간 5개국 7개 도시를 돈다는 무모한 계획만큼이나 다양한 에피소드, 즉 추억을 남긴 첫 유럽 (배낭)여행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서른 맞이 여행 정산
그때부터 내게는 자의 반 타의 반 여행할 기회가 운 좋게도 여러 번 주어졌다. 결국 여행 기자를 직업으로 삼아 해외를 다니게 되면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딘지’ 답해야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거의 모든 여행지, 모든 여행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좋았으니까. 첫 유럽 여행 이후로도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을 뿐, 뜻밖에도 나는 여행이 적성인 사람인 것이었다. 어느 순간 여행은 내 인생의 치트키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 주변 정리정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가 굳이, 이제 와 지난 여행을 정산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험주의자로서 모든 경험은 겪을 때보다 겪고 나서 돌이켜 보았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걸 안다. 지난 10년간의 여행을 정산하면서 당시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무엇보다 한 살 한 살 늘어갈수록 나 자신은 자꾸만 작아지고, 한동안 후유증에 빠져 허우적댈 정도로 강렬했던 여행의 기억들도 점점 흐릿해져만 간다. 하루에도 수백번 감정과 생각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순덩어리인 나지만, 이제는 말해줘야만 할 것 같다. “너에겐 몇 번이고 떠났다 돌아오는 용기가 있어. 덕분에 먹고 살 추억도 이만큼이나 많이 남았으니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