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서막
나는 엄마와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라고 믿는다. 성격이나 취향, 성향,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아 여행에 가서도 평소와 비슷하게 자주 싸우게 되지만, 그래도 기회가 닿는 한 꽤 여러 번 해외로 떠났다.
그 시작은 내가 교환학생 때였다. 그때까지 먹고사는 일만 해도 마음이 바빠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딸도 있겠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딨냐’는 아빠에게 등 떠밀려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엄마와의 첫 해외여행이 결정된 순간부터 내 마음은 기대 반 압박 반이었다. 타지살이에 적응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터에 존재 자체가 왠지 애틋한 엄마의 방문은 반가웠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주일 남짓한 엄마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을지 심히 고민이 됐다. 산지 고작 4개월밖에 안돼 파리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타인의 여행을 완벽히 설계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착각한 탓이었다.
여행 전 한국에서 미리 개통해 간 인터넷 전화(새삼스럽지만 당시엔 카카오톡도 활성화돼 있지 않았다)로 통화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고 각자 묻기만 했다.
“편하게 등산복만 가져가려는 데 괜찮겠지?”
“엄마 뭐 하고 싶어?"
"돈은 더 필요 없니? 환전해가야 할까?"
"엄마는 가고 싶은 데 더 없어?"
마침내 대망의 그날이 다가왔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공항버스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탄 순간부터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기에 별도의 숙소를 마련해야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무조건 알뜰해야 한다는 엄마의 방침에 따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언니의 스튜디오에서 며칠 신세를 지기로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스튜디오로 가는 길은 흑인들이 특히 많이 거주하는 동네를 지나야 했다. 피부가 까만 승객들이 버스에 점점 더 많이 탈 때마다 엄마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한 마디 했다.
"엄마 좀 무서워. 너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니?"
나는 바로 핀잔을 줬다.
"아니 엄마 저 사람들은 여기 주민이야. 저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 같은 이방인이 무서울 수도 있어. 그런 얘기 어디 가서 했다간 큰일 나. 그거 인종차별이야."
파리에서 생활하며 종종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던 나는 인종차별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한동안 잊고 있었을 뿐, 우리 모녀에게 다름은 틀림의 문제였다. 나는 나고, 엄마는 엄마인데 우리는 평소 늘 한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다 싸우기 일쑤였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사람이 달라질 리 없었다.
파리의 상징이라는 에펠탑에 다다랐을 때 우리의 감정도 최고조에 달했다. 나는 분에 못 이겨 파리 한복판에서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루브르 박물관에 엄마를 혼자 둔 것이었다. 기숙사 계약이 만료돼 당장 다음 학기에 살 곳을 마련해야 했던 나는 집주인의 스케줄에 맞추느라 하필이면 엄마가 오고 나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계약 날 엄마를 대동하고 가는 것보단 엄마 혼자라도 관광을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게 엄마한텐 굉장히 서운하고 무서운 경험이었나 보다. 내가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자 엄마는 다짜고짜 호통을 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를 혼자 두고 가니! 국제 미아 되는 줄 알았네.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출구가 어디냐고 물었다가 괜히 혼났잖아."
아니, 하루 종일, 반나절도 아니고 두세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하는 것뿐인데, 그것도 구경할 거리가 널린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지내야 할 집을 계약하느라 그런 건데 나는 나대로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가 미웠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음 코스인 에펠탑으로 걸어가며 우리는 치열하게 다퉜고, 결국 내 안의 섭섭함이 폭발해 이럴 거면 난 더 이상 같이 못 다닌다고, 어디 엄마 혼자 여행해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이역만리에서 의지할 데가 서로 말고 또 있을까. 에펠탑도 보는 둥 마는 둥 인증샷만 겨우 찍고 저녁 식사를 하러 에펠탑 근처의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명당인 테라스 자리에 앉으니 눈앞에는 조명이 반짝거리는 에펠탑과 휘영청 밝은 달이 펼쳐졌지만 내 눈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씹고 있는 게 스테이크인지 껌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악사의 음악과 즐거운 웃음소리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 사이엔 냉랭한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