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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y 09. 2019

우연한 인연 2

수상한 유럽 헤드 헌터

교환학생 시절 방학을 맞아 떠난 두달 간의 유럽여행의 종착지는 덴마크 코펜하겐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동안의 여행과는 달리 코펜하겐에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공항과 시내를 잇는 기차를 타고 창밖을 봤더니 바깥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 북유럽’이라는 설렘도 잠시, 예약해둔 호스텔까지 찾아가는 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비때문에 때이르게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홀로 헤매일 미래의 내가 훤히 그려졌다. 지금 같으면 구글맵으로 어떻게든 찾아갔겠지만, 당시엔 방향치인 내가 의지할 것은 공항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종이 지도 뿐이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나. 기차역에서 내려서부터 호스텔까지는 고난과 역경의 길이 이어졌다. 그다지 늦지 않은 시간인 것 같은데도 장난감이라 해도 믿을 형형색색의 집들이 늘어선 골목골목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북유럽은 ‘워라밸’이 월등하다더니 전부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금세 온몸은 물론 마음까지 홀딱 젖었다. 호스텔이고 뭐고 그냥 주저 앉아 울고싶었다. 바로 그때, 기적처럼 한 현지인 커플이 다가왔다. 주소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도 헷갈리는지 호스텔로 전화를 걸어 길을 물었다. 친절한 그들 덕분에 국제미아꼴을 간신히 면한 나는 체크인 후 씻고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둘째날, 전날의 악몽을 최대한 잊으려고 노력하며 호스텔을 나섰다. 여행 내내 그랬듯 가장 먼저 들를 곳은 관광 안내 센터였다. 시내 지도를 받고 간단한 하루 코스나 들를만한 곳을 추천 받고나서야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됐다. 코펜하겐 시내 관광 안내 센터는 규모도 크고 자료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내게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아 여기저기 두리번대고 있는데,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 백인 아저씨 한 명이 말을 걸었다. "한국 사람인가요?" 잠깐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한국인이었어요." 지난 번 글에도 썼듯 원체 낯을 가리는 사람이지만, 혼자만의 여행이니 서두를 필요도 없고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별 의미없는 말을 이어갔다. "아, 그러시군요." 서먹한 대답에도 그는 막힘이 없었다.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이제부터 계획이 없다면 제가 코펜하겐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고 싶네요." 딱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짓고 그를 쳐다보는 것도 잠깐, 어느새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나서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놀이공원이라는 티볼리 공원부터 '코펜하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의 뉘하운 항구,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에 필적하는 인어공주 동상까지 그는 코펜하겐에서 꼭 봐야하는 것들을 알차게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북유럽의 아름다움보다는 시내 투어 중간중간 툭 던져진 그의 발언들이 더욱 놀라웠다. 초반에는 가벼웠던 대화 주제가 뒤로 갈수록 심오(?)해졌는데, 서로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본심이 드러났다. "교환학생이라며 유럽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나요?" 한창 해외에서의 삶을 꿈꾸던 나는 당연히 기회만 주어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이 대답은 그의 미끼를 덥썩 문 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 제안하고 싶은데요. 사실 나는 유럽 귀족의 크루즈 여행에서 쇼를 담당하고 있어요. 스트립쇼라고 들어봤나요?" 아니, 스트립쇼라니.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맞았다. 그제서야 아뿔싸 싶었지만, 갑자기 도망치는 건 위험을 높이는 것 같았다.애써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제안은 고맙지만 아무래도 나와는 맞지 않는 일 같아요."

다행히도 시내 투어는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백화점과 각종 상점이 자리 잡은 번화가인 스트뢰에 거리에 들어서자 안도감이 들면서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내 정중한 거절에 감동한 듯했다. "내가 하는 일을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여준 사람은 당신이 거의 처음이네요. 고마움의 표시로 저녁이라도 사고 싶어요." 이건 또 무슨 말 같잖은 소린가. 그동안 반응이 그랬으면서 나를 한 번 떠본건가. 끝내 화가 나려 했다. 그의 정체를 점점 더 알 수 없기에 도망칠 구실을 만들었다. “그럼 저는 호스텔에 잠시 들러야할 것 같아요.” 그는 다녀오라며 미소를 띤 채 배웅을 해 주었다. 당연히 영영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거늘 코펜하겐에서 만났던 수상한 아저씨는 뇌리 깊숙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여행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이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 아저씨가 진짜 또라이였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나 혼자 <비포선셋> 같은 만남을 꿈꾼들 현실은 엄연히 영화와 다르다. 여행은 꿈이자 현실이다. 낭만적인 기분에 취해 쓸데 없는 위험은 무릅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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