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연둣빛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서 오월을 기다리곤 했다. 올해엔 초록을 더해가는 속도보다 빨라진 마음으로 기다린 듯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때문이다.
끝없이 재생되는 사랑 이야기를 매튜 본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의 과감한 시도가 바꿔놓을 캐릭터가 궁금했다. 관객의 머리와 가슴 속에 화석처럼 이미지화된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을 파격적으로 바꿔놓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바라보는 눈임을 피력해 온 안무가. 2019년 런던에서 초연한 댄스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엘지아트센터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불멸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다수의 무용수가 착용한 의상이 새하얗다. 무대 배경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간이 분명하다. 청소년을 수용하는 이곳은 정적인 장면에선 정신병원으로, 동적인 부분에선 교도소로 보이게끔 한다. 그 안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마주한다.
로미오는 전학 온 학생처럼 등장한다. 얼마간의 긴장이 확고한 불안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자신의 스타일은 이내 차례차례 벗겨지더니 유일하게 허용된 하양의 규율이 입혀진다. 그렇게 불안이 학습되고, 때때로 숨통을 열어주는 파티에서 저마다의 색을 잠시나마 되찾을 때 첫사랑과 마주한다.
프로코피예프. 그의 음악을 매튜 본도 거부할 수 없었나 보다. 같은 음악으로 원작에 충실한 발레와 비교하면서 감상하다가, 주요 장면에서 반복 연주되는 강렬한 주제 선율에 무대의 이야기를 잠시 놓치기도 한다. 무대 정중앙으로 내려온 미러볼에 반사된 조명이 알록달록 객석까지 회전하면서 춤을 춘다. 통제에 익숙해진 줄리엣의 눈빛이 미러볼로 변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한다.
두 가문의 골 깊은 갈등은 찾을 수 없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티볼트는 수용된 청소년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역할이다. 아, 매튜 본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부당한 권력 집단, 혹은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바라보고 있구나. 적절한 관리라는 명목으로 개개 청소년의 고유색이 바래지도록 유도하는 여기도 베로나였다. 불량품을 골라내는 공장이 존재하는 도시.
상반된 감정을 오가며 폭풍 질주하는 시기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까. ‘문제’ 학생에 대한 시선을, 뜨겁고 격렬한 ― 이성애뿐만 아니라 동성애까지 포함한 ―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는 몸짓.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지만, 이 작품 역시 비극으로 볼 수 없다. 두 가문이 화해로 끝을 맺으면서 셰익스피어의 무대가 희극으로 구분되듯이 시설에 수용된 청소년의 연대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사회의 톱니바퀴로 움직일 테니까.
그 어떠한 움직임도 춤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 막 내 안에 들어온 사람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 일순 얼어붙는, 미동도 찾기 어려울 때조차 춤이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는 움직임도, 거침없는 열정으로 압박에 대항하는 움직임도 모두 춤이었다.
오늘의 눈으로 재해석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캐릭터의 ‘불변’을 깨뜨렸지만 ‘불멸’은 다시금 입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