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BANKSY : 진짜 나
지난 일주일, 서울 친정으로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일주일의 여정 가운데 아이를 부모님께 맡겨두고 혼자 보낼 수 있는 딱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워졌다. 이 소중한 시간을 무얼 하고 보낼까 고민하다 마침내게 익숙한 종로에서 그동안 단편적인 이미지와 기사로만 접해 궁금했던 예술가. 뱅크시의 전시회가 있다고 해 이곳에 다녀왔다.
이렇게 혼자서 전시회를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근 몇 년간은 어쩌다 전시회를 가도 항상 한 손에는 아이의 작은 손이, 또 다른 한 손에는 언제 필요할지 몰라 봇다리 장수처럼 들고 다니는 아이의 짐가방이 있었는데 말이다. (불과 지난주, 속초아트페어 관람 때의 모습이다.)
가벼운 양손 탓인지 마음 또한 한결 더 높게 들떠 전시회는 모든 발걸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리얼뱅크시 전시회를 둘러보며 크게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전쟁터에서 작품 활동한 뱅크시를 보며 '그동안 내가 너무 나만 보고 살았구나.' 하는 자책의 시각이다.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 전쟁통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위해 반전을 외치며 그린 풍자 섞인 작품들을 지나칠 때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어느덧 어른이 되어버린 내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이다. 뱅크시는 말한다. 작가에게는 예술계와 타협하지 말고, 관객에게는 투자목적이 아닌 정말 좋아하는 그림을 사라고 말이다. 이 글귀가 팻말로 적혀있었는데 머리가 띵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하는 심오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REAL BANKSY
바야흐로 10년 하고도 더 거슬러올라 내가 신입 1년 차 디자이너이던 시절, 언론사의 광고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며 나름의 진로고민이 찾아왔다.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과 광고주가 원하는 디자인에서 꽤나 큰 괴리감을 느낀 것이다. 신입이었던 터라 당시 이런 내 고민에 대해 보다 편하게 이야기하며 다양한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많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회사를 다닐 거면 디자인 프로그래머가 되고, 원하는 디자인을 할 거면 아티스트가 되자."
결국 나는 프로그래머의 길을 걸었고, 이제는 작가의 길을 걸으려 하고 있다.
최근 최은영 작가의「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책을 읽었다. 단편소설 모음집인데 여기에 실린「몫」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신입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대학교 편집부의 이야기로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A는 여성운동에 관한 글만 고집하다 편집부와 지속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고 직접 현장에 나가 여성운동가가 된 반면, 이 글의 화자 격인 B는 큰 소질은 없지만 편집부를 통해 꾸준히 글을 쓰며 실력을 쌓아 기자라는 직업에 이르게 된다.
재능이 있는 사람과 쓰고 싶어 하는 사람. 과연 누가 글을 써야 하는 걸까?
보통 '글쓰기 코칭', '베스트셀러 작가되는 법'과 같은 류의 책들을 살펴보면 나를 위한 글이 아닌 독자를 위한 글을 쓰라고 한다. 내 글을 읽을지 말지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독자이고, 이들의 선택에 따라 글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의 영역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소식이나 정보를 알려주는 뉴스 기사나 블로그 포스팅 같은 것들 말이다.
지난 10여 년 간, 나는 디자이너로 일해왔지만 엄밀히 말하면 디자인을 해주는 프로그래머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인지 디자인을 좋아하는 마음은 어느새부턴가 빛을 잃었고, 이렇게 다시 가슴 뛰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새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진정한 아티스트의 길을 걸어보고자 한다. 내 글의 1번 독자는 나 자신이다. 내 글이 부디 가치를 발견해 주는 독자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