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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일로 Mar 30. 2024

조각 안에 담긴 모습

<아이 웨이웨이: 메이킹 센스>

처음으로 근무한 전시장의 모습과 겨우 낯가림을 끝냈을 즈음 긴장감이 다시 찾아왔다. 뮤지엄의 기대가 가득 담긴 아이 웨이웨이 단독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상에서 쓰이는 제품들이 끝없이 생산되고 부서지는 현상에 빗대어 형성되고 사라지는 우리의 가치관을 조명하는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선정된 작품과 더불어 관람 방법에도 작가의 개성을 담을 계획이었다. 전시장 안에서 정해진 동선으로 관객을 얽매지 않고, 작품의 제목과 설명을 벽에 적지 않으며, 가까운 거리에서의 감상을 위해 전시물 대부분에 보호선을 두지 않기로 했다. 작가의 예술적 성향이 보는 이의 경험에도 스며들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기획 아래 현실적으로 전시물의 훼손을 막아야 했던 스태프로서 나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작가의 작품과 수집품 대부분이 이미 손상되었거나 대량 생산된 물품이었기에 온전성과 희소성이 떨어진 전시물 앞에서 관객의 태도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입장 전부터 관객에게 주의를 당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문을 열어 전시장 바닥에 펼쳐진 거대한 작품과 무수한 수집품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말은 잊은 듯했다. 작품 앞을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은 뚜렷하게 남았다. 조금만 의식하지 않으면 작품들은 발에 치여 굴러가고 손에 닿아 흐트러졌다. 관객과 전시물의 접촉을 막고, 훼손되었을 경우 복구될 때까지 사람들의 카메라에 촬영되지 않도록 제지해야 했다. 온종일 사람들의 신발, 손가락에 시선이 향했고 작품과 관객의 사이가 좁혀질수록 나의 예민도는 올라갔다. 거둬진 선 앞에서 하나 잃어버려도 모를 레고 장난감부터 얼룩이 져도 차이가 없을 오래된 구명조끼까지 조심히 다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그중 유난히 사람들의 발에 많이 밟히는 작품이 있었다. 2018년 중국 베이징에 위치했던 작가의 스튜디오가 정부로부터 철거당하며 훼손된 도자기를 모아 만든 ‘Left Right Studio Material’(2018)이었다. 도자기 조각들로 덮인 바닥은 당시 참담했던 스튜디오를 재현하는 듯했다. 그 옆에는 파손되기 전 본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Bubble’(2008)이 놓여있었다. 재료의 성질을 고려하며 흠 없이 가장 커다란 크기로 여럿 제작된 도자기 중 하나였다. 작가의 응집된 역량을 보여주듯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나란히 배치된 두 작품은 물방울이 터져 일어난 바다 물결을 연상시켰다. 모두 다른 모양과 채도의 조각을 바라보면 마치 기억 속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미운 정인지 동질감인지 반드러운 도자기보다는 울퉁불퉁한 조각에 계속 시선이 걸쳤다.


런던에서 빚어가는 나의 경험도 작가의 도자기처럼 상한 자국 없이 아름답길 바랐다. 해가 갈수록 남겨진 책임감은 무거워져 갔지만 그 무게를 잘 감당했을 때 미래의 나에게 버팀돌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주하는 상황에 최선으로 반응하며 온전하고 가치 있는 경험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의 결과물이 모두에게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그런 탐탁지 않은 눈초리는 불편한 자극으로 다가왔고 숨기고 싶었던 나의 못나고 찌질한 면들도 드러냈다. 나의 정성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말 앞에서 한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깨진 조각을 일기장에 모으기 시작했다. 온전하지 못해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려진 선 안에 가둬 지켰고 서서히 책장 속에 쌓여갔다.


일렁이는 생각에 잠겨가던 중 맞은편에 한 관객의 말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발에 치여 쓸려나간 조각을 보고 어차피 훼손된 거, 한 번 더 밟혔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며 지나갔다. 그 미운 뒤통수를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왜 이렇게 가까이 두어서, 아니 모아둔 조각들을 왜 굳이 꺼내서…’ 한숨을 내쉬며 널브러진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또 한 번 망가진 흔적에 닿았을 때 그 속에 나의 신발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바라본 조각 안에는 나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글을 쓸 때 나의 무너진 흔적들을 두고 항상 고민이 된다. 어떤 모양의 조각을 보여야 할지, 몇 개를 꺼내야 할지, 시간이 지나도 다시 마주하는 조각에 마음이 욱신거리는데 내놓는 게 맞는지. 그때의 무너짐을 자세히 보여줄수록 나를 지켜주는 선이 희미해질까 봐 두렵다. 그 관객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 때면 하찮게 여겨질 아픔은 내 안에 가둬두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작품 앞에 거둬진 선은 공감의 자리로 이끌어줬다. 발에 차인 파란 조각이 나의 모습을 비추어 준 것처럼. 일기장 속 그어진 줄에서 나의 상한 도자기들을 조금씩 꺼내본다. 좁혀진 거리 끝 언젠간 되비칠 누군가의 모습과 나의 조각이 맞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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