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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달리 Jan 09. 2024

그 봄, 잘 하고 싶은 마음들2

연두를 보라 

              

이른 봄에 길을 나서면 생명의 눈을 틔우는 연두로 눈이 부시다. 느리거나 더디 오는 연두가 있고, 성급하게 와서 빼꼼하게 머리부터 내미는 연두가 있어, 연두와 연두가 층층을 이루며 아롱이는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왠지 설렌다. 가끔 딴청을 피우다 늦게 도착하는 연두도 있겠지만, 연두 없이 계절이 없고, 겨울 없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믿어 온 이치라서 그런지, 조금 이르거나 늦는 일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기어이 온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의 근거와 무관하게 연두는 연두 그 자체로 세상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연두와 마주하는 일이 설레는 것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이 깃드는 순간은 신비이고, 그 신비는 누군가가 결코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경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은 있다.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앞서 땅 깊은 곳에서 견뎌온 연두의 ‘생명 됨의 시간’이 그렇다. 형체 없는 무형의 모습으로 생명 됨의 믿음이 차오를 때까지, 캄캄한 동굴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매만지며 연두는 미소를 배웠을까. 그게 아니라면 우울해하고 좌절해하다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어둠 속 깊은 굴속에서 ‘생명 됨의 시간’이란 높이 뛰어오를수록 고독이 짙어지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깊은 고독과 닮아있다. 흐트러지지 않게 자신을 매무시하며 공중을 사뿐히 넘어가는 고독, 자신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고, 자신을 믿어보자는 마음을 힘껏 밀어 올리는 순간, 연두는 제 의지로 고개 들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두 빛의 새싹은 앞 또는 위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고, 연약하지만 강한 생명력이라는 결을 가지게 되었겠다. 봄의 길이 생기를 지니는 이유는, 새싹들이 그 방향과 결로 대지를 움켜쥐고 있는 것에 있을 게다.   

  


연두와 마주하는 일에 이유 없이 마음이 가는 것은, 어느 기억의 시간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어릴 적 뒷산 아래에서 살던 친구는 이른 봄이면 햇나물을 캐러 다녔다. 친구들과 나는 이따금 친구를 따라 다니며 신이 나서 나물을 캐곤 했다. 연두 빛깔이 진해지기 직전의 나물을 골라 바구니에 채우면 무언가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일었다. 친구는 나물이 많은 밭이나 산비탈을 잘 찾아다녔다. 친구가 가는 곳마다 풍성한 나물밭을 보며 ‘이런 데를 어떻게 다 아냐’고 묻곤 했다. 친구는 놀란 표정의 우리에게 ‘그냥 안다’면서 나물을 힘껏 캐냈다.

     


봄이 오면 기억 속 어딘가에서 친구가 나타난다. 허공에 몸을 내어주며 여리고 가느다란 상처의 몸으로 자연의 밑그림이 되어주는 연두로 온다. 기억이 친구를 부르러 가는 건지, 아니면 아직 친구는 그 시간 속에 앉아 나물을 캐고 있는 건지 알아볼 수는 없다. 그 시절 우리가 나물을 한 아름 캐서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가면, 친구는 숙인 고개로 골목 끝을 밀며 멀어져갔다. 언제부턴가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동네에서 굳이 찾지 않아도 얼마 안 있다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우린 친구를 잊고 지냈다. 


    

봄나물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던 그때, 친구는 아버지의 밥상에 그 나물을 약으로 올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친구는 거동이 어려운 아버지의 병환에 요긴한 나물을 캐러 다녔던 거였다. 겨울의 바람이 발치 끝에 맴돌던 시린 마음으로, 아버지가 짊어진 고통의 울음을 덜어내고 싶어, 나물 한 가닥을 한 가닥을 캐냈을 어린 손은, 어쩌면 하늘에 드리는 기도이며, 지금을 사랑하는 자세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친구를 알지 못했고 삶을 알지 못했다. 봄날의 연두 빛에 누군가의 기도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지 풍문으로도 알길 없는 친구이지만, 결코 고통에지지 않으면서, 더 이로운 날들을 꿈꾸면서, 살고 있다는 걸, 기어이 오는 봄날로 나는 알 것 같다. 오늘이라는, 몸이라는 책을 넘기면서, 삶의 어느 문장에는 밑줄을 그으면서, 또 어느 날은 너무 바빠 밑줄을 그은 것도 잊으면서, 애쓰며 애써가며 무던히 살고 있을 거라는 것만 같다. 아무리 먼 곳에 산다 해도 우리가 우리의 몸을 먹여 살리는 일에 충실하듯이. 오늘 하루도, 그리고 다시 오는 오늘 하루도 함께 흘러가는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연두와 마주하는 일을 ‘봄이 문을 연다’라고 다시 쓰고 싶다. 지금 봄은 겨울의 발목쯤 오고 있다. 머잖아 봄을 만나면 봄나물을 수려하게 부르는 이월령도 불러보고, 싹 틔우는 일에 몰입하다 갈라졌을 봄의 발뒤꿈치도 매만져 보고 싶다. 어린 발꿈치가 벌개 지도록, 대지의 중심을 꼭 잡고 걸어온 연두와 마주하면서, 한낮의 연애처럼 지금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것이다. 무명의 이름으로 다가와 보상도 없이 흔적도 없이 제 생명을 모두 내어주는 이들 앞에서, 나의 삶이 그들에게 얼마나 크게 빚지고 살아가는지, 그걸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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