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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달리 Jan 16. 2024

그 봄, 잘 하고 싶은 마음들3

-사랑은 언제나 등 뒤에서 배운다 

 ‘내게 무해한 사람’     


인터넷 서점을 살피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서적을 보고 ‘무해’라는 단어에 마음이 갔다. 수 년 전의 일이다. 마음에 끌려 구입한 책에 컵 하나가 사은품으로 왔다. 작고 낮은 노란 텀블러다. 책은 이후 책장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 컵은 나의 애장품이 되어 이후로도 늘 나와 함께 했다. 무엇보다 컵 외면에 새겨진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문구가 꼭 나를 위한 문장 같았다. 일 할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친구들과 만날 때도 이 컵은 늘 나와 같이 했다. 그런 연유로 이 컵으로 주목받는 일도 종종 따랐다.      



세미나 참석차 남해에 갈 때의 일이다. 동행하는 이들과 한 차로 함께 가게 되었다. 멀미를 많이 하는 나는 주로 운전대를 잡는 편이었는데, 그날도 운전을 맡았다. 남해는 내게 낯선 지역이었다. 도로 사정이 어떤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성능 좋은 네비게이션만 믿고 가는 동안 어깨에 긴장과 부담이 가득했다. 나 외에 다른 이를 태우고 먼 길을 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안정과 안녕을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의 중압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 일행 중 한 명이 첫 번째 휴게소가 나오자마자 쉬어가자고 했다.


     

휴게소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음료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나는 노란 텀블러에 받아 온 커피를 마시며 유난히 파란 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A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게 무해한 사람?”, 이라 읊조리곤 내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나는 나에게 무해한 사람은 싫더라, 유해한 사람이 좋더라.”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컵을 들어 문장을 읽었다. 그 순간 ‘무해’와 ‘유해’ 사이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을 두 말이 하나의 말로 다가왔다.      


‘무해’와 ‘유해’ 사이     


그때까지 주의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장의 시작이 “내게”라는 것을. ‘나’라는 주어, ‘나’로 시작하는 말이 갖는 ‘정체감’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아플 때, ‘나’를 몰라준다며 가족이나 친구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않은 일이나, 세상이 ‘나’ 중심이고, ‘나’만이 소중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간은 모두 ‘나’만을 위해 달라고 떼쓴 얼굴 붉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서 헤어 나오는 일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또 그만큼의 성찰이 함께 해야하는 일이었다.   


   

다분히 “무해”란 말에 마음이 간 것은 이전의 ‘나’ 중심의 시간을 기억하는 내 마음이 한 일일 터였다. 그 말 위에 “유해”라는 말이 포개져 하나의 뜻으로 다가오는 것도, ‘유해’라는 말 역시 결코 ‘무해’하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는 마음의 해석에 다름 아닐 터였다.     



나는 ‘내게 유해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 A 옆에 앉아 운동화 밑창으로 바닥을 쓸고 또 쓸었다. 평소 자기 성장에 관심을 두고 열정을 다해 사는 A에게 ‘유해’는 자극일지 모른다. ‘무해’는 해롭지 않아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정체되어 있는 ‘안정’에 가까운 느낌이 있지만, ‘유해’는 어떤 부호이고 신호로 ‘동력’의 느낌일 수 있다. 그가 지닌 자신감과 의지가 좋은 영향력을 가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어 즉 말은 주인이 없다. 그리고 말이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재미가 있다. 이 뜻에서 저 뜻으로 미끄러지는 말, 어느 누구도 그 말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일 게다. 주인 없는 말은 한 순간 머물다 떠나는 것이 숙명인 셈이다. 그러니 ‘나’라는 중심의 말도 어느 순간은 머물고 어느 순간은 떠나는 말이 되어야 할 게다. ‘나’라는 말이 ‘나’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말로 ‘나’를 소중하게 만드는 쓰임으로, 그 주어가 내게 머물다 가길 바라 본다.     


로맹 롤랑은 그의 소설 『사랑과 희망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너의 결함, 너의 심술, 

                                                              너의 삶의 법칙을 받아들인다.     

                                                                                            ”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너’를 ‘나’로 바꿔 읽는 버릇이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나를 ‘무해’하게 만든다고 여기면서부터 내가 나에게 가만히 건네는 선물이다. 나와 마주하여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일에 때로 실패도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가 해야 할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너’로 정색하여 바로 읽을 때, 마음의 구석마다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알 수 없는 느낌이 온다. 나도 모르게 내가 가장 ‘무해’하게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다면 바로 그 순간일 게다.


      

잠시 쉬던 자리를 털고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일행은, 이른 봄의 정경으로 산기슭에 노릿노릿 피어있는 꽃 이름을 맞추느라 열에 떠 있었다. 생강나무 꽃이라 하는 사람과 산수유나무 꽃이라 하는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다 서로의 핸드폰 속에서 사진까지 찾아 디밀어 옳음을 입증하려했지만, 멀리 서 있는 나무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노란 텀블러를 들어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봄의 나무들은 꽃의 이름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어느 이름이어도 괜찮을,

모든 재량권을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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