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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혜 Feb 23. 2024

5. 술맛이 달콤한 밤


화려한 조명과 매캐한 음식 냄새, 시끌벅적한 가운데 지원만 고요했다.

아, 고달프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되냐.

지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술이 단 날이 있다. 주량을 넘겼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날. 쓴맛은 없고 달콤한 향만 입안에 머문다.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 오늘 술맛 괜찮은데? 싶을 땐 이미 맛이 간 것이다. 지옥에서 온 숙취 당첨이다.


술자리는 즐거웠다. 처음엔 그랬다. 부원장은 호탕하게 술자리를 지휘했다. 

더 시켜, 내가 쏜다! 짠! 마셔! 달려! 파이팅!


지원은 정신없이 바빴다. 메뉴판을 가져오고, 수저를 놓고, 안주를 시켰다. 지원이 자연스레 움직이듯, 강사들도 편안하게 심부름을 시켰다. 

논술, 티슈 좀. 초고추장 더 달라 그래. 여기 뭐, 얼음은 없나?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을 무렵에야 지원은 간신히 목을 축였다. 입맛이 썼다.


“부원장님, 경력이 화려하던데요. 이렇게 젊은데 대단하세요. 나는 그 나이 때 뭐 했나 몰라.”

수학이 노가리를 쫙쫙 찢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죠. 욕심 많은 외동딸이라 부모님이 다 지원해 주셨고.”

부원장이 반짝이는 손톱으로 땅콩 껍질을 벗겼다.


“부럽다. 나도 유학 가고 싶었는데, 알아서 돈 벌어 가라고 해서 못 갔잖아요. 지금 영어로 먹고사는 게 신기할 지경이야.”

영어가 얼음을 와작 씹었다.

“부원장님, 영어 수업은 안 하세요? 거의 네이티브 수준일 테니까.”

영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난 행정이랑 상담, 강사 교육을 하러 온 거예요. 수업은 노노.”

부원장이 영어를 안심시킨 뒤, 짠! 다시 잔을 부딪쳤다. 수학과 영어는 단숨에 맥주잔을 비웠다. 지원은 호출 벨을 눌러 맥주 두 잔을 새로 주문했다.  


“나 전화 좀.”

부원장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틈을 타, 수학이 지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논술, 부원장님이랑 친하지?”   

지원이 뭐라 답하기 전, 영어가 끼어들었다.

“맞아, 나도 둘이 있는 거 봤어. 그런 소문 도는 거 알아? 논술이 부원장 스파이라고.”

지원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자 수학이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스파이냐고!”

“네?”

“우리끼리 주말에 보강 안 하기로 단합한 거, 원장 귀에 들어간 게 논술 때문이라던데? 논술이 부원장한테 말한 것 같다고. 둘이 맨날 붙어있으니까.”

지원은 입을 헤 벌렸다. 어버버 하는 사이, 혈관에 알코올이 확 퍼지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랬나? 내가? 

일부러 찾아가 일러바친 적은 없었다. 부원장이 다가와 물어보면, 그저 아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다. 부원장은, 우리 둘만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갈 일 없다고. 쉿, 난 안샘만 믿잖아. 부원장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논술, 설마 나 눈꼬리 튼 것도 말하진 않았지? 요즘 애굣살 넣는 건 수술도 아냐, 시술이야.”

수학이 구시렁거리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사이, 부원장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아니 뭐, 논술이랑 부원장님이 꽤 각별한 사이라는…. 그 말에 부원장이 지원을 힐끗 돌아봤다. 훑어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잘못 봤나? 싶게 짧은 순간이었다. 부원장은 평소처럼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스스로 냅킨을 가져오고, 물을 셀프로 챙겼다. 강사들과 부원장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넷이 앉아 있으나 세 사람만 떠들었다. 

내년 수업 안, 명절 연휴, 월급 인상… 정규직들만 하는 이야기였다. 지원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조용히 있는 게 무안해 술로 입을 적셨다. 자리는 불편하고, 마음은 복잡한데, 술맛만 달았다.


화려한 조명과 매캐한 음식 냄새, 시끌벅적한 가운데 지원만 고요했다.

아, 고달프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되냐.

지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예전에 엄마는 단체 손님을 맞고 나면 잔잔히 앓았다. 몸살 기운이야 늘 있었으나 내일도 가게를 열어야 하므로 아플 짬이 없었다. 병원에 갈 시간도, 처방전을 받을 틈도 없는 엄마에게 특효약은 고춧가루를 탄 소주였다. 감기야, 뚝 떨어져라! 주문을 외우면서 툭 털어 넣던 소주 한 잔. 독약을 삼키듯 인상 쓰는 엄마의 표정과, 빨갛게 가라앉은 술잔, 맵고 쓴 냄새. 소주는 엄마의 인생같이 고달프고 고달픈 맛이었다.    


*


지원은 비틀거리며 막차에서 내렸다. 버스가 떠나자, 정류장에 불이 꺼졌다. 그나마 택시비를 아껴서 다행이었다. 부원장과 강사들은 대리를 부른다고 했다. 지원이 먼저 일어서니, 다들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2차에 따라갈 생각도 없었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제 세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스파이냐고 따지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맥주가 더 필요하다. 지원은 머릿속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젯밤 마지막 캔을 비웠으니까, 집에 없을 것이다. 마트로 가는 길은 가로등 전구가 나가 어둑했다. 두려운 마음에 주머니 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 문 닫았네.”

지원은 절망적이었다. 12시가 넘으면 마트 문을 닫는다는 걸 생각지 못할 정도로 취했단 말인가. 하지만 편의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알바가 말이 많고, 자꾸 다가오고, 친근하게 굴기 때문이다.

맥주를 포기하려니, 지원은 더욱 슬퍼졌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손님! 여기요! 큰일 났어요. 할 말 있어요! 이리 와 봐요, 어서! 빨리! 허리업! 하야쿠!”

아니나 다를까, 지원을 알아본 알바가 뛰쳐나왔다. 애써 모른 척하자, 두 팔을 휘저으며 불러 세웠다.

“손님, 나 몰라요? 리치맨! 우리 지난번에 인사했잖아!”

어딘가에서 ‘시끄러워, 잠 좀 자자!’ 버럭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는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였다. 어쩔 수 없이 지원은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손님. 한동안 안 오셨잖아요. 그동안 글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내 말 좀 들어봐요. 사실은 말이죠….”

리치맨이 주절주절 떠들며 지원을 따라다녔다. 지원은 굳게 마음을 먹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꾸 없이 물건만 사서 나가기로 했다. 지금은 도저히 받아줄 기운이 없었다. 여러 번 오기 싫으니까 한 번에 여러 개를 사가야지. 장바구니 없이 맨손으로 열두 캔을 옮기려던 게 패착이었다.


퍽!

맥주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맥주를 바닥에 던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깡통이 폭발한다는 걸. 충격에 열린 캔 뚜껑 틈으로 맥주가 쏴악 터져 나왔다.

“으악!”

지원은 비명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 와중에 더 이상 놓치지 않으려고 맥주 열한 캔으로 저글링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떡해, 죄송해요!”

술이 확 깨버린 지원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말끔하던 편의점 바닥이 술냄새와 거품으로 가득했다. 진상이 되어버린 자책과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늘은 왜 이리되는 일이 없을까.   


그때였다. 리치맨이 기세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너무 웃기다. 그쵸? 무슨 샴페인 터지는 줄 알았네. 나 오늘 월급날이라고 손님이 축배를 들어주시네. 팔십만 원밖에 안 되는데.”

리치맨이 키득거리며 대걸레를 가져왔다. 그가 바닥을 닦는 사이, 지원도 허둥지둥 휴지를 꺼내 카운터까지 튄 맥주 방울을 닦았다.   


대충 수습이 끝난 뒤, 지원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리치맨은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제는 소줏값 깎아달래서 안 된다니까 병을 깨버리고 도망친 주정뱅이도 있었거든요.”

“헉! 안 다치셨어요?”

“내가 털끝이라도 다쳤으면 그 사람은 인생 끝났죠. 팍 그냥 이단 옆차기를 날려서 모가지를 따줬겠죠. 곱게 병만 깨고 가서 봐준 거예요. 원래 유단자는 일반인을 응징하지 않는 법.”

“치우느라 힘드셨겠어요.”

“대 코로나 시대에 가게를 알코올로 소독한다 생각하고 싹싹 치웠습니다. 오늘 또 맥주가 터졌으니까, 여긴 세균 한 마리 없어요. 완전 깨끗해.”

“죄, 죄송합니다….”

지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맞다. 아까 하려던 얘기를 못 했는데. 슬픈 소식이 있어요, 손님.”

맥주 열한 캔을 바코드로 찍던 리치맨이 말했다. 오늘 더 이상의 슬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지원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맥주 값이 올랐어요. 이제 네 캔에 만원 아니에요. 무려 만 이천 원임. 그 소식 듣자마자 손님이 떠올랐어요. 에휴, 어쩌나. 내 시급만 빼고 다 오르네.”

리치맨이 투덜거리며 바코드를 찍었다. 망연자실한 지원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깊어 있었다. 오늘 밤이 참 길다. 고달픈 밤이었다.  


*


6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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