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여자 / 에드가 엘런 포와 에너벨 리
영문학 역사를 돌이켜보면 요절한 시인, 소설가들도 많고, 각종 질병이나 역경에 시달리면서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작가, 에드가 엘런 포만큼 처절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작가는 아마도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오늘날 에드가 엘런 포는 호손과 멜빌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미국 단편 소설의 대가, 또한 유럽에서 더욱 인정받고 있는 19세기 미국문학의 위대한 천재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생존하던 시대에는 호구지책마저도 어려운 극빈층의 괴짜 문필가에 불과한 존재였다.
40세에 길거리에서 행려병자 취급을 받으며 쓰러져 죽은 그의 황당한 죽음은 비밀에 휩싸여 있어서, 아직까지도 그 명확한 사인조차 밝혀져 있지 않다. 포의 사망을 확인한 의사 친구는 그의 죽음이 폭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친구는 금주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포의 경우를 논문에 인용하는 바람에 자신의 주장에 신빙성을 잃게 된다. 그러자 포의 죽음에 관해, 희귀성 뇌질환, 당뇨병, 매독, 심지어는 광견병에 걸린 흡혈박쥐에게 물려 죽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소문까지 시중에 떠돌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상한 소문은 그가 발견된 날이 마침 선거날이기도 해서, 선거 사기용으로 깡패들에게 납치되어 약을 투여받은 뒤,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가짜 투표에 이용되다가 길바닥에 버려졌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조차 않아서, 장례식에 열 명도 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무덤의 위치조차 그 정확성 여부가 의심이 될 지경이다. 사실 포의 이러한 기가 막힌 불행의 역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미리 예고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13세 사촌동생과의 사랑
에드가 엘런 포는 1809년 보스턴에서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데이비드 포의 아들로 태어났다. 채 한 살도 되기 전에 집을 나간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세 살 때는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는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이후 부유한 담배 사업자인 존 엘런에게 입양이 되어, 엘런이라는 미들 네임을 얻게 되었다.
양아버지는 부유한 사람이었으나, 포는 그의 문학 작품에도 드러나듯이 어딘가 자기 파괴적이고 음울하면서 탐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알코올을 배우게 되고,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는 도박에 빠져서 양아버지의 신임을 잃게 된다.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하던 그를 양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의 사관학교에 입교시켜서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꼬박 일주일간 학교에 나가지 않아서 명령불복종으로 퇴교조치를 당하고 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양아버지는 절교 선언을 해버렸다. (이후 양아버지의 신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유산조차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한다).
포는 이후 미망인이었던 숙모 마리아 클램과 사촌인 버지니아와 함께 볼티모어에서 거주하게 된다. 하고 싶었던 일인 소설 쓰기와 편집자의 일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설가나 시인으로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그였지만 편집인으로서도 뛰어났던 그는 그 엄청난 폭음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글들을 수없이 써서, 그가 일하는 동안 <남부문학통신>의 발행부수가 500부에서 3500부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월급은 달랑 주당 10달러에 불과했다.
그 시기에 그는 인생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바로 그의 사촌이었던 아름다운 버지니아가 그 상대였는데, 26세의 포가 버지니아와 결혼을 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에 불과했다.
지극히 청교도적인 도덕주의가 판을 치던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그 유명한 <어셔가의 몰락>이나 <황금충>,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검은 고양이> 같은 기괴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을 써내던 작가였던 포는 문단에서 기분 나쁜 이단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편집자로서의 포는 당대의 대부분의 작가들과 사이가 안 좋은 갈등관계에 있었다. 심지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급기야 겨우 열세 살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악명이 하늘을 찌르고 더욱 드높아질 수밖에 없는 화룡점정(?)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포와 버지니아의 사랑은 가난과 곤경, 사회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애절하고 진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 부부의 결혼 생활이 이어지던 시기가 바로 미국이 대공황이었던 시절이라, 그들은 정말로 궁핍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842년에는 포의 부모를 앗아갔던 결핵이 아내 버지니아에까지 침범, 그 후 5년간 포는 아내의 병마와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면서 더욱 절망적인 폭음을 일삼게 된다.
1847년 1월, 추운 겨울이었다. 버지니아가 마지막 병으로 신음할 때, 문병을 왔던 친구 그로브스 부인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날씨는 굉장히 추웠고, 아픈 버지니아는 끔찍한 오한과 폐결핵으로 인한 열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허름하기 짝이 없는 침상에 눕혀져 있었고, 남편의 커다란 외투를 유일하게 덮고 있었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가슴팍에는 기르던 고양이가 올라앉아 있었다.
고양이의 체온을 빌려서 병마와 싸우던 젊은 부인이 겨우 2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남편은 군용 외투에 싸인 아내의 유해를 언 땅에 묻었다. 어린 아내를 지극히도 사랑했던 그는 그 후 무덤 근처에 오두막집을 전세내서 죽은 아내 곁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아내가 좋아했던 달리아꽃을 잔뜩 심고 가꾸면서, 이제는 우울증에 빠져서 아편에까지도 손을 대게 된다. 그는 아편의 힘을 빌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무덤가를 배회하면서 정신을 놓고 울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지극한 사랑과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절대적인 상실감으로 인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시..... 청소년 시절, 우리들의 책받침에서도 흔하게 봤던 바로 그 <애너벨 리>이다.
옛날 오래전에
바닷가 한 왕국에
애너벨 리라 불리는
한 소녀가 살았다.
이 소녀는 날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이외는
딴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나는 어렸었고, 그녀도 어렸었다.
바닷가 이 왕국에,
그러나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었다.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
천국의 날개 돋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질투할 만한 사랑으로,
이것이 이유였다.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와
나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히 한,
그리하여 그녀의 귀한 친척들이 와서
나로부터 그녀를 데려가
바닷가 이 왕국에 있는
무덤에 가둬 버렸다.
천국에서 우리의 반만치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시기한 것이었다.
그렇다! - 그것이 이유였다 (바닷가 이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바람이 밤에 구름으로부터 불어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히 죽인.
그러나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더 강했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
우리보다 현명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기에 달빛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이 내게 찾아들고,
별들이 떠오르기만 하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느낀다.
그래서 밤새도록 나는 내 애인,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의 곁에 눕는다.
그곳 바닷가 무덤에서
철썩이는 바닷가 무덤에서
특히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신부의 곁에 눕는다는 마지막 구절을 보면 무덤가를 헤매면서 정신을 놓고 울곤 했다는 포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남편의 낡은 외투밖에는 덮을 것이 없었던 처절한 가난 속에 속절없이 죽어갔던 아내의 모습을 ‘바닷가 왕국에 사는 아름다운 소녀, 천사들도 시기하는 행복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다시 탄생시킨 그의 시는 낭만주의 문학의 한 전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두운 작품 속에 나타난 한 줄기 낭만의 빛
버지니아가 죽고 난 후 포는 2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 사이에 여류 시인 사라 휘트먼을 잠깐 만나기도 했고, 예전의 애인 새라 엘머러 로이스터와의 재결합을 꿈꾸면서 금주회에 가입하는 등,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1849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행려병자로 발견이 되고 만 것이다.
그가 죽고 나서 이틀 후에 생전에 그가 써놓은 시인 <애너벨 리>가 세상에 발표된다. 그리고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포는 유럽에서 보들레르, 발레리 등의 시인들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프랑스 상징파의 시조로서 각광을 받게 된다. 코난 도일에게 깊은 영향을 남긴 추리소설의 시조라는 영광도 함께 얻게 된 것은 물론이다.
포가 생전에 그나마 명성을 얻은 작품이 바로 <갈가마귀>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에도 역시 버지니아를 잃은 포의 잔인한 깊은 슬픔이 잘 묘사되고 있다. 버지니아를 잃은 후, 그의 작품세계에는 이처럼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내 연인이 다시는 이 보랏빛 쿠션에 기대앉지 못하겠지?
- nevermore (다시는 없으리)
슬픔을 고치는 향이란 게 있을까? 나에게 말해줘
- nevermore
슬픔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 가련한 영혼에게 말해 주오
저 멀리 에덴에서도 성스러운 소녀를 껴안을 수 있는지
세상에 둘도 없이 빛나는 소녀를
- nevermore
또한 포의 거의 모든 소설의 무대는 지하실, 무덤 등등 산 사람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죽은 자들의 공간이며, 시간은 밤, 색채는 흑단같이 어둡고 피같이 붉은빛이었다.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살인이나 시체 은닉, 시체 해부 등등 기괴한 범죄나 기행들이었고, 이야기의 주인공들 또한 광적으로 날카로운 신경을 소유한 기형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단순히 ‘악마의 수기’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 어둠 속에 한 줄기 눈부신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가 과거를 회상하거나 여성이나 사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흔히 나타나는 낭만의 광채이다. 이 광채의 아름다움은 지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천상의 것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희귀한 것이다.
포의 이러한 낭만적이고 탐미주의적인 성향은 문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소설을 읽는 행위를 마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평하는 평자들이 많다. 포의 작품들을 보면 운율의 아름다움은 물론,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전체의 작품을 하나의 아름다운 조형물로 만들려고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병고와 가난, 불운, 사별, 맞지 않는 세상과의 가망 없는 싸움으로 이어진 어둡고 죽음에 가까운.... 기괴하기까지 한 그의 인생에서 한 줄기 눈부신 빛이 있다면..... 버지니아와의 절대적인 사랑의 경험과 여기서 영감을 얻은 예술 작품의 창조라고 볼 수 있겠다. 밤이 깊기에 아침이 더욱 눈부신 것처럼, 잔혹한 운명에 시달린 그의 어두운 삶에서 창조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시는 아름답고 찬란하다.
사후에도 포는 수많은 논쟁과 미스터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유명세가 점점 더 높아짐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헐 공동묘지에서 포의 묘지를 좀 더 찾기 쉬운 입구 쪽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마침내 묘지가 이장이 되었다.
1949년부터는 해마다 매년 그의 생일인 1월 19일, ‘포의 건배자’라고 불리는 이상한 방문객이 그의 무덤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포가 즐겨 입던 검은색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무덤에 반쯤 마신 코냑과 장미꽃 세 송이를 놔두고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 송이의 장미는 포와 그의 어머니와 아내 버지니아를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포의 무덤에는 그의 마지막 말인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가 써져 있다고 한다.
<갈가마귀>와 <애너벨 리>는 처음 읽을 때나 천 번을 읽은 다음이나 똑같이 매력적이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예술가, 타고난 문학의 귀족이다.
--- 조지 버나드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