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3
집 근처 역 앞에는 커다란 잡화점이 있다. 페컴의 다이소.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자주 봐서 친해진 점원에게 커터칼을 찾고 있다 이야기하자, 신분증을 보여달라 말했다. 영국에선 날붙이나 에너지 드링크를 성인에게 만 팔 수 있는 것이다. 당황스러우면서 웃음이 나오는 미묘한 기분. 지갑을 꺼내 보여주었고, '나 아직 안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나섰다.
아마도 처음은 담배를 사던 때였다. 자정을 기점으로 친구들과 모였던 그날. 선호는 손쉽게 담배를 살 수 있었고, 나는 신분증 확인을 요구받았다. 선호는 억울함을 호소했고, 우리는 그런 사소한 일들로 신을 내곤 하던 시절. 해가 지나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열심히 술을 마셨다.
오늘 점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가게를 나서자 그때의 냄새가 났다. 우리에게서 풍겼던 술냄새, 선호와 내게서 났던 고약한 담배냄새. 어둠이 내려앉은 페컴에선 그 시절의 냄새가 난다. 가락동에서 신천동, 자양동을 지나 뚝섬에서 함께 했던 그 시절의 기억과 함께.
오랜만에 간 한국, 당연히 선호와 술을 마시기로 했다. 신분증 확인을 위해 여권을 꺼내 보여주었고, 그 순간 우리는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시답잖은 이야기에 시간을 쏟았고, 선호는 여전히 어른스럽게 느껴졌고, 나는 여전한 한량. 서로의 깔린 밑잔을 경계하고, 벌써 집에 갈 생각을 하냐며 만용을 부리고, 이 친구 이거 술이 많이 약해졌네- 하면서 너스레를 떨던 그때로. 우리는 철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나 만. 선호는 요즘 쇠질을 열심히 한다고 했었으니, 그런 점에선 확실히 철들긴 했다.
20대의 나는 그랬다. 커피를 내렸고, 신분 확인을 종종 받았고, 술버릇이 고약했고, 달마다 월간 윤종신을 기다렸다. 지금의 나는 쓰는 언어가 달라졌고, 여전히 말주변은 별로 없고, 술은 줄고 담배는 끊었고, 나폴리탄을 자주 해 먹곤 한다. 달라진 것은 있지만 변하지는 않았다. 내가, 선호가, 우리는 그렇다.
나는 여전히 그 동네를 신천이라 부른다. 나는 그랬고, 여전히 그렇다. 나는 그 어감이 퍽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