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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May 13. 2024

한 우물만 팠더니 그 우물에 빠졌다 (11)

7. 영어로는 할 수 없는 것.

나는 한국어를 잘한다.

당연하게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로 말을 했으며, 글쓰는 것도 좋아하고, 책을 읽는 것까지 좋아하니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할 수도 있다. 착각이라도 할지라도 어쨌든 한국어로 긴 문장을 만들고,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살을 붙이기도, 빼기도, 적당히 버무릴줄도 안다.


그렇기에 수식어가 많은 나의 말들은 때때로, 어중간하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 역시 직설적이기 보다는 에둘러서, 듣기 좋고 말하기 좋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 그만뒀다며. 요즘 그럼 뭐 하고 지내? 하고 물으면,

그냥 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엄쉬엄. 뭐 할까 생각도 해보면서 지내고 있어. 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So, what do you want to be(그래서, 넌 뭐 하고 싶은데)? 하고 물으면,

.... 뭐랄까. 할 수 있는 답이, 적어진다.


서툰 영어로는, 변명을 할 수가 없다.







1년에 400만 원의 학원비를 낼 생각이 없던 나는, 어쩌면 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정의 목표를 가졌을 때, 대뜸 400만 원을 내기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물론 400만 원을 내면 내겠으나, 4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계산해 보았을 때 그것의 가치가 영어학원보다 높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슬프게도 그랬다.


차라리 그걸로 커피 한 잔, 친구와 수다 한 번, 술 한 잔, 여행 한 번.

어쨌든 400만 원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나는 내가 찾아두었던 다른 학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학원은, 싼 가격에 영어로 회화를 하는 학원이었으며 원어민 선생님과 소수의 학생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학원이었다. 고급반에서는 정말 신문에 나올법한 주제들을 다뤄서 토론을 해야 했는데, 애시당초 그 반에 들어갈 실력이 되지도 않았겠으나, 어쨌든 고퀄리티의 대화 주제가 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한국어로도 잘 하지 않는 토론, 그게 될까?


두 번째 학원은, 그런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랬는지 달콤하게 위스키를 곁들였다. 술 한 잔을 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과하게 과음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첫 번째 학원과 비슷하게 원어민 선생님과 대화를 했지만 조금 더 풀어진 분위기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부가적인(술)것이 붙어서 가격이 조금, 아주 조금 더 나갔다.



나는 첫 번째 학원으로 향했다.

가격이 더 쌌기 때문이냐고? 아니, 그러기엔 고퀄리티 토크가 나와는 맞지 않을 걸 알았지만,

다음 날 바로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예, 저는 성격이 급합니다.

마침 친구도 다음 날 신촌에서 볼일이 있다고 한 터라 나는 서둘러 예약을 잡고, 다음 날 신촌으로 향했다.


잡아둔 예약 시간보다 조금 빨리 근처 카페에 도착한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파파고를 켰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엔 가득했는데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파파고에 있는 문장을 외우고 또 외웠다. 물어볼 질문이 정해져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뻔한 질문 몇 가지가 있을 것 같으니 답을 외웠다.


How are you? 하면, I'm fine thank you, and you? 라던가.

왜 영어를 배우고 싶은지? 라던가.

취미가 뭔지? 라던가.

네 직업은 뭐니? 나이는 몇 살인데? 오늘 날씨 어때? 오늘 기분은 어떠니? 등등. 뭐, 어쨌든 얕은 나의 상상력으로 할 수 있는 예상 질문을 뽑아 어설픈 답을 준비했고, 시간이 되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떨렸다.

학원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을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싶었으나, 어쨌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선생님과 인사를 했다. 한국어로의 대화는 간단했다.


왜 영어를 배우고 싶은지, 무슨 일을 하는지, 오늘 날씨가 좋다는 둥.

내가 영어로 했으면 좋겠다 싶었던 기본 회화들이 한국어로 오갔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 이제 영어로 대화를 한 번 해볼까요?"


아.

나는 정말로 어버버, 거렸다.

어버버버,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아, 아직 영어를 시작 안 했다.

그런데도 한국어로 어버버 거렸다.

영어요?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하며 어버버 거리는 순간 선생님의 말이 시작됐고, 간단한 회화에 머리가 어질어질 해졌으나, I'm fine thank you, and you? 수준의, 외우고 외운 달달 외운 회화로만 대화를 연명하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던져졌다.


"You said you quit your job? What do you want to do from now on?"

(직업을 그만두셨다고요? 그럼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 하고싶은 것?



그게 없어서, 그걸 찾으려고 제가 여기 왔는데요. 아직 딱히 하고 싶은 건 없고, 어릴 적부터 꿈꿔온 건 있는데 그게 하고 싶은 거긴 한데, 그러니까 제가 꿈 꾸는 건...



한국어로는, 긴 문장으로 변명을 하고 수식어를 덧붙이고, 꾸며댈 수 있는 문장 앞에 나는 멍해졌다.

정말이지 영어로는 조금도,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수식하지 않는, 변명하지 않는,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나의 명확한 꿈을 뱉어내야했다.







*본문에 나온 영어는 파파고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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