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주말 낮 점심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에는 조카가 놀러 와서 피아노를 치며 혼자 놀고 있었고 나도 오랜만에 한가롭게 멍 때리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물감을 뿌린 듯한 파란색 하늘과 따뜻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고 기분 좋은 봄날의 날씨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집에만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아노 치며 놀고 있는 조카를 아이스크림으로 꼬드겨서 드라이브를 하러 나갔다.
나는 따뜻한 날씨에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드라이브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휴식도 좋아하지만 드라이브를 하며 그날의 날씨를 맘껏 느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절에 따라 길가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좋은 날씨 덕분인지 조수석에 앉아있는 '집순이' 조카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최근에 즐겨 듣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드라이브를 하는데 옆에 있는 조카가 "이모,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 그거 틀어줄 수 있어?"라며 신청곡을 요청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여자애가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내가 모르는 요즘 아이돌 노래를 이야기하겠지? 미리 짐작도 해보았다. 조카가 귀엽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계속 듣고 싶은 마음에 귀찮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함께 따라와 준 게 고마워서 "당연하지, 노래 제목이 뭐야?"라며 물었다. "흰 수염고래" 조카가 대답했다.
'이 노래를 어떻게 알지?' 예상하지 못한 노래제목이라 깜짝 놀랐다. 윤도현 밴드의 '흰 수염고래'라는 노래는 2011년에 발매된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이다. 윤밴(윤도현밴드)은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좋아했던 가수였다. 쉬운 시원하게 고음을 내는 락 장르의 음악을 하는 윤밴은 나의 최애 팀이었다. '흰 수염고래'라는 노래는 위로와 힘이 필요할 때 듣기 좋은 노래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였기 때문에 반갑기도 하고 노래 가사가 뭐였지? 라며 기억을 떠올리며 노래를 틀었다.
윤도현은 목소리가 아주 단단하고 발음도 아주 깔끔하고 정확하기 때문에 모든 가사가 또렷하게 들리게 노래를 부른다. 그런 점이 내가 좋아했던 부분이었다. 멜로디가 좋아하서 가사를 찾아봤을 때 곡의 내용과 가사가 맘에 들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윤밴의 노래가 그랬다. 역시나 이번에도 차 안에 크게 틀어놓은 '흰 수염고래' 노래를 들으며 드라이브를 하는데 가사가 아주 정확하게 들렸다. 가사를 꼽씹으며 듣고 있는데 감정이 말랑말랑해지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왠지 모르지만 '명상안내자' 과정을 수료했던 그 순간들이 떠오르며 처음 명상을 했던 그때의 기억이 났다. 슬프고 아픔에 대한 눈물은 아니었고 반가움과 따뜻함에 대한 눈물이었다.
'흰 수염고래' 노래의 가사 이 부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 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명상안내자 과정을 수료하면서 내면의 나(참자아)와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처음 솔직하고 용감하게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수산나야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게, 정말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였다. 그동안 나에게 너무 억압하고 엄격했던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나를 챙기고 사랑해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었었다. 무언가 실패를 하거나 실수를 할 때 예전의 나는 자기혐오가 아주 심했던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고 항상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명상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사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강한 사람이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흰 수염고래'의 '넌 혼자가 아니야,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 가사에서 그때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용기와 사랑의 감정이 떠올라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괜히 옆에 있는 조카가 너무 고맙고 어린 조카에게도 앞으로 크고 작은 힘듦이 있을 텐데 흰 수염고래처럼 자신을 믿고 주변에서 항상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묵묵하게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조카가 보면 놀릴까 봐 괜히 창문 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얼른 소매로 닦고 나서 '흘끗' 조카를 바라보는데 해맑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아닌가. 조카의 순수함에 피식 웃음이 났다. 며칠 동안 그때의 좋은 분위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잠깐의 드라이브 시간이 참 감사했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조카도 너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