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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아 Dec 18. 2023

1996년

이야기의 시작

마냥 신이났다.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생이 뭐가 그리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마냥 신이났다.

처음 본 캐나다는 6학년때 여행으로 다녀온 그 곳...

천국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곳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어린나이에 어머니에게 이런 소릴 했다고 한다.

"엄마. 인생은 한번 뿐인데 여기서만 살아야해? 더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자나?"

이 말을 들은 엄마는 누군가 머리를 한대 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한번도 살면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어린 아들녀석이 저런 소리를 했다.

그게 우리 가족 이민 결정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 강남의 사람들이 들으면 '우와... 그 동에 살았어?' 하는 동네에 가득한 현찰에 접히지 못하고 항상 입을 벌리고 있는 아버지의 지갑을 보며 살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낭비 하거나 사치를 하며 자라진 않았다. 항상 절약하는 이유를 교육하셨던 부모님 덕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밴쿠버로 이주했다.

형은 나름 전국 석차로 얘기 할 정도는 했지만 난 그렇지 못 했다.

그러던 녀석이 무슨 자유를 얻는 다고...

도착한 두 형제는 고삐 풀린 망아지 였다.

이 나라 학교 분위기가 그렇다. 더욱이 한국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좋으나 싫으나 공부하던 아이들은 더욱 그랬다.

학교는 놀러 가는 곳이고 성적이 안 좋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부모님은 걱정 하셨지만 곧 이 분위기에 휩쓸리셨다.

더욱이 중2 1학기도 마치지 않은 나는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수학은 12 학년때 조금 말고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아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난 한국에서 공부를 못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때 알았어야 했다.

원래도 공부에 별 뜻이 없던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나오는 성적에 더욱이 공부에서 멀어져 갔다.

아니... 멀어지게 만들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시 몇 안되는 한인들이 대부분이 비슷했다.

몇몇 열성을 놓지 않은 부모님을 둔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했고 대체적으로 졸업장을 위한 공부를 했다.

뜻도 없는 일상에 쓸모 없는 과를 전공하고 졸업후엔 부모님이 하시던 그로서리나 세탁소를 도왔다.

모두가 그러진 않았겠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지금이야 워낙 이민자가 많아서 많이 다르지만 그땐 밴쿠버 전역이 거의 다 아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한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뜻은 없지만 공부도 좀 하고 지금은 가슴팍에 캐나다를 달고 하는 일을 한다.

벌이도 나름 괜찮다. 국가 일을 한다는 자긍심도 있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가 셋이다.

그런데 한국을 가야겠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것 같다.

인생의 반을 훌쩍 넘게 살아온 이 나라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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