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최정호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최정호에 대해 알아보자.
대부분의 일반인, 디자이너들도 낯설 것이다. 한글 활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이름을 들어볼 일이 없을 테니, 나 역시 글자를 그리면서 그 이름을 괜히 멀리한 적이 있다. 그래픽에 가까운 레터링 작업을 하며 김진평 디자이너의 작업은 자주 찾아보았지만, 본문용 활자를 주로 그린 최정호 디자이너의 글자는 굳이 찾아볼 일이 없었다. 본문용 활자야 이미 많은데 새롭고 재미있는 글자를 그리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기본도 모르면서 실험적인 조형만 추구하다 보니 금방 바닥이 드러났다. 작업을 반복할수록 더 이상 다르게 그리기가 어려워지고, 새로운 형태는 억지스럽게 왜곡되며, 결국 글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능, 판독성 마저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기본을 찾게 되었고, 최정호의 글자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원도 시대의 근대 본문용 활자, 명조체와 고딕체만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으로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섬세하고 정교하여 놀랐다. 안타깝게도 모든 글자가 원도로 남아있지는 않다. 글자를 보니 사람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졌고, 노은유 디자이너가 지은,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라는 책을 구매하여 읽었다. 그의 생애, 어떤 글자를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무엇을 추구하였는지, 그 일부를 엿본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기는 그렇고, 한글 활자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최정호 디자이너는 동아출판사 본문 활자를 시작으로 삼화 인쇄사, 보진재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활자 등 주로 출판, 인쇄 관련 업체의 의뢰를 받고 활자를 제작했다. 이를 최정호 초기 활자라 할 수 있는데, 이후 사직식자기가 도입되며 인쇄 매체가 발달하고, 이에 따라 샤켄과 모리사와 같은 일본 업체의 의뢰를 받아 활자를 제작했다. 초기 활자는 원도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샤켄과 모리사와의 경우 본사에 원도를 보관하고 있어 노은유 저자는 직접 방문하여 열람한 것을 책에 담았다. 현재까지 많은 편집 디자이너 분들에게 사랑받는 sm 명조 시리즈는 이 샤켄과 모리사와 활자에 영향을 받아 최정호 활자의 미감을 담고 있다.
근대 활자. 당시 여러 한글 활자 디자이너가 활동했지만 단연 최고는 최정호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다른 디자이너 분들의 발자취도 좇고 싶다. 시간이 나면 종종 중고서점을 찾는다. 내가 찾던 책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고, 절판된 책을 구하면 보물이라도 찾은 듯하다. 이 당시 중고서점에서 보진재 출판사의 1960~1980년 사이 출판된 서적을 찾아다녔는데, 원도를 구할 길이 없으니 당시 서적에 인쇄된 글자를 찾아보았다. 찾으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인쇄 상태가 좋은 초판본을 구하다 보니 고작 8권 밖에 구할 수 없었다. 내가 맡은 활자는 보진재 출판사의 명조체지만 다른 명조체와의 차이점도 알고 싶어서 동아출판사와 삼화인쇄의 책도 찾아보았다. 그렇게 점점 오래된 책의 매력에 빠져 고서적까지 찾아보게 되었지만, 가격이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옛날 잡지를 몇 권 구해 제목 활자와 레터링을 찾아보기도 했다.
최정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점점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자료조사만 하더라도 온라인 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결국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다. 자료의 가치를 접근성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자료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레트로한 컨셉의 레터링 자료를 찾는다면, 구글이나 핀터레스트에서 찾지 말고,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60~1980년대 신문 광고의 레터링을 찾아보는 게 훨씬 좋다. 근대 활자를 넘어 고전 활자까지 살펴보면 훨씬 다채로워진다. 고전 활자는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메뉴의 고도서 - 원문 이미지 - 소설류 - 국문 카테고리를 살펴보면 굉장히 다양한 자료가 수집되어 있다. 고전 활자를 살펴보면 특히 흘림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한글이 세로 쓰기가 계속 발달해왔다면, 라틴알파벳의 이탤릭처럼 흘림도 더 발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정호 초기 활자는 세로 쓰기에 맞추어 그려졌다. 당시 출판물을 살펴보면 세로 쓰기와 가로 쓰기가 모두 사용되었는데,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60년대에는 세로 쓰기가 조금 더 많은 것 같고, 80년대, 시간이 흐를수록 가로 쓰기가 주를 이룬다. 살펴본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세로 쓰기로 조판된 판면을 보면 세로 쓰기 글줄이 굉장히 매력적이라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활자를 그리다 보면 한글뿐만 아니라 라틴알파벳과 숫자나 문장부호 등 다른 여러 요소와의 조화가 필요한데, 최정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리고 있는 흑단에 라틴알파벳과 숫자를 원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그릴 지, 흑단의 획에 어울리도록 새로 그릴 지 고민하고 있다. 처음에는 모든 글자를 집자하여 원전에 맞추려 했지만, 조화를 생각하면 새로 그리는 방향이 더 좋을 것 같다. 원전의 크기나 비례는 참고하되 형태는 현재 흑단의 획에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작은 한 페이지 안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인쇄된 흑 뿐만 아니라, 자간과 행간, 글자의 속공간 같은 백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각 글자의 비례, 구조, 관계, 조형 규칙과 체계까지 담겨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가고 있다. 단순히 근대 활자의 형태를 좇는 것이 아니라, 최정호의 자형 설계 방법론과 최정호 활자의 미감, 그가 활자에 담은 시대정신까지도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