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음산한 공간. 붉은 안광(眼光)을 내뿜는 존재가 나를 쫓아왔다. 나는 겁에 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도망쳤다. 계단 위쪽에 철문이 보였다. 급히 계단을 올라 두꺼운 철문을 열며 안도하는 순간, 철문 반대편에 중갑(重鉀)을 두른 악마가 붉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악마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으악!!!"
꿈에서 지른 비명이 현실 세계까지 울렸다.
"무슨 걱정 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잠에서 깬 나를 보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괜찮다는 듯 대답하고는 화장실에 가 얼굴을 물로 적시고 다시 누웠다.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다음 날, 풋살 약속이 있어 환복(換服)하려 집에 들렀다. 집에는 조카가 와 잠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발목이 잡혀버렸다. '가지 말까...? 그래도 약속했으니...' 풋살장으로 가는 길. 우연처럼 구급차가 지나가며, 어젯밤 꿈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심해야지.'
게임이 시작됐다. 나는 상대를 따돌리기 위해 땅을 밟은 왼발을 들며, 동시에 오른발로 공을 빼려 했다. 왼발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었던 걸까. 생각과 달리 왼발을 떼지 못한 채 공과 땅을 동시에 밟아버렸다. '뚝' 왼쪽 발목에 깊은 충격이 가해지며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주저앉아 발목을 잡았다. 통증은 심하지 않았는데 뛰면 안 될 듯하여 먼저 귀가했다. 발목을 보니 퉁퉁 부어있었다. 급한 대로 얼음찜질을 하고 다음날 정형외과 문을 두드렸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내측 복사뼈에 금이 갔다고 한다. 큰 부상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병원에서는 반깁스를 해주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금이 간 복사뼈보다 그 아래쪽 통증이 심했다. 이상하다 싶어 다른 병원을 찾아가니 삼각 인대 부분 파열이란다.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튼튼한 조직이라 파열되는 경우가 드문데 회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보존 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잘 안 붙으면 수술해야 된단다.
겨울 추위는 뼈와 인대 조직을 굳게 해 보행에 제약을 걸었다. 내리막을 걸을 때면 바늘 수십 개가 뼛속을 찌르는 듯했다. 차도가 없어 다른 정형외과와 한의원, 재활병원을 거치며 여러 치료를 시도했다. 그렇게 여섯 군데 병원을 거쳤다. 병원마다 제 각각의 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은 타들어갔다. 10개월이 넘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서울 아산 병원을 찾아 담당선생님에게 영상 자료를 제출했다. 자료를 유심히 보던 선생님은 내게 몇 개의 테스트를 했다. 수술하지 않아도 되고, 재활을 열심히 하라는 결론이 났다. 더 이상 병원을 갈 이유는 없었다.
이미 재활 센터를 다니던 나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스승께 부탁드려 교정을 받고, 재활 방법을 바꾸었다. 재활 운동을 몇 개 하고 나서 뛰어보라고 하셨다. '걷기도 힘든데 뛰라고?' 나는 어색한 뜀박질을 했다.
"이미 의식하며 뛰고 있어. 의식하지 말고 더 빨리 뛰어."
이때 알게 되었다. 생각으로 지고 있었다는 걸. 생각이 지니 몸도 지고 있었던 거였다. 문득 깨달아졌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쳐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이리도 크구나.' 이후 재활을 지속한 끝에 통증 없이 뛰게 되었다. 전보다 균형 감각이 떨어지긴 했지만 다시 뛸 수 있다는 행복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고 후 회복까지 1년. 악마에게 붙잡히고 벗어나기까지 걸린 기간이다. 오랜 시간이지만 결국 이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