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제는 대학병원 진료가 있었다. 2주 전에 CT를 찍었기 때문에 CT촬영과 채혈 검사를 토대로 진료가 진행된다. 진료 보는 날 오전에 아이 등원시키려고 부랴부랴 나왔는데 카톡이 울렸다.
서대문구에 사는 환우분이 약속이 연기되었다고 병원 가기 전에 서대문구에서 보자고 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과 가까워서 부담이 없었고 또 병원 가는 날 기회가 돼서 보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우리는 작년 여름에 문수산에서 산을 함께 타고 각자의 위치에서 치병하느라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시간은 모래 한 줌처럼 손바닥 사이로 흘러갔다.
나는 사실 전 날 북한산 오봉탐사지원대에서 입산하여 도봉산 신선대에서 Y계곡을 지나 포대능선을 타고 산악 마라톤을 하듯이 하산을 하였다. 총 10km가 넘는 강도 높은 산행으로 오늘 오전에는 좀 휴식을 취하려던 참이었다.
서대문구에 사는 소국님은 숲 속한방랜드라는 숯가마로 나를 초대했다.
네비에 검색해 보니 출근길이라 자차로 1시간 40분이 걸렸다. 서울은 워낙 복잡하고 대중교통이 더 빠르고
수월할 것 같았다.
아이를 9시에 등원시키고 총알같이 서대문구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1시간 30분은 잡아야 했다.
9시에 출발하면 11시 전으로는 도착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오후 2시 10분에 진료가 있으므로 2시까지 병원에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실상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 숯가마를 할 수 있었다.
아무 스케줄 없이 종일 지지고 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우리가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국님 얼굴을 보러 간다는 생각으로 앞, 뒤를 따지지 않고 가기로 결정했다.
출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고촌에서 개화까지 차가 밀려서 평소보다 시간이 3배는 더 걸렸다.
개화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서 직행 버스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직행버스번호가 정류장에는 없었다. 정류장에서 서성이다가 시간만 지체되어 전철을 타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재빠르게 동선을 바꿔 전철을 탔다.
개화에서 김포공항까지 가서 김포공항에서 홍대입구에서 갈아탄 뒤에 다시 신촌역으로 가는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전철은 버스보다 빨랐다.
신촌역 4번 출구에서 나와서 위로 쭉 걸어 올라오면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 정류장에는 봉원사행 버스가 있었는데 종점이 바로 숲 속한방랜드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오전에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왔는데 금방 비가 그쳤다. 정류장 철제 의자가 차가울 줄 알았는데 따끈했다.
'서울특별시가 배려심도 특별하네.'
나는 서울특별시의 특별함을 정류장의 따끈한 철제의자에 앉아서 엉덩이로 느끼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왔다.
"카드 찍지 말고 그냥 타세요."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파업 중이라 찍지 말고 그냥 타서 가시라고 했다.
나는 어쩌다 파업의 파도를 타고 숲속한방랜드까지 무임승차로 잘 왔다.
소국님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다가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특유의 잇몸만개 미소로 활짝 웃으면서 말이다.
소국님께서 쿠폰이 있다고 한방랜드 입장권을 내 것까지 내주셨다. 그날 점심은 내가 사기로 했다.
소국님을 따라서 옷을 갈아입고 숯가마가 있는 곳으로 갔다. 뜨끈뜨끈 숯이 타고 있는 숯존에 가서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벌써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계셨다. 따끈따끈하니 너무 좋았다.
숯가마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소국님이 싸 온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따끈하게 불을 쬐었다.
숯가마 앞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회포를 풀었다.
소국님은 단발머리에서 커트로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바뀌었는지도 몰랐다.
그간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그냥 그런 머리 스타일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국님은 잇몸만개 웃음을 짓고는 있었지만 얼굴빛에서 숨길 수 없는 멜랑꼴리한 감정이 드러났다.
소국님은 내색 하지는 않으셨지만 최근에 항암을 권고받고 심경이 복잡하고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연명을 위한 항암이고 항암이 궁극적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심경이
복잡한 것 같았다. 소국님은 일주일에 4~5번씩 숯가마에 와서 숯가마를 쬐고 있다고 하셨다.
숯가마 뒤로 안산이 있어서 안산에서 맨발 걷기 운동을 하고 숯가마를 하며 지내신다고 하셨다.
평일에는 아르바이트도 하신다고 했다. 아르바이트하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하셨다.
둘째 아들이 군인이라 군마트에서 산 수정과도 챙겨왔다며 수정과도 따라주셨다.
나는 계피향이 나는 달콤한 수정과를 한 잔 마시고 꽃탕이라는 숯가마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숯을 쬐던 아주머니들이 꽃탕이 엄청 뜨겁다고 나보고 들어갈 수 있겠냐고 했다.
나는 얼마나 뜨겁길래 못 들어갈 정도로 그렇게 뜨거울까 싶었다.
소국님의 타월을 빌려서 뒤집어쓰고 꽃탕 앞에 있는 나막신을 신었다.
꽃탕에 들어가려고 커튼을 젖히고 얼굴을 집어넣었는데 불구덩이 같은 온도에 깜짝 놀라서
재빠르게 커튼 밖으로 나와버렸다.
"꽃탕이 아니라 불구덩인데? 저길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야?"
나는 너무 놀래서 혼잣말로 중얼댔다. 평상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저기는 고수들만 들어가는 데에요. 뜨거워요."
순간 꽃탕에 들어갔던 한 아주머니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웰던 스테이크처럼 잘 구워져서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꽃탕은 포기하고 고온 숯가마로 들어갔다. 고온 숯가마도 제법 뜨끈뜨끈했지만 견딜만했다.
야외에 캠핑장처럼 바람을 쐬며 쉴 수 있도록 평상이 깔려있는 공간도 있었다.
여유가 있다면 여러 번 들락날락 거리며 숯가마를 즐기고 싶었는데 시간이 빠듯했다.
나는 다시 숯댕이 아궁이로 가서 소국님 옆에 앉았다.
이곳은 자리 경쟁이 치열해서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면 자리를 뺏긴다며 소국님은 내게 먼저 꽃탕에 갔다 오라고 했다.
"꽃탕은 완전 불구덩이던데요?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난 못 들어가겠어. 소국님 꽃탕에 들어가요?"
"나는 꽃탕 들어가. 갔다 오면 너무 좋아. 꽃탕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야.
자기는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야."
벌써 오후 1시가 다 되어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숯댕이 아궁이를 뒤로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모두 육식 메뉴들 뿐이라서 먹을 수 있는 게 순두부찌개뿐이었다. 순두부찌개 2인분을 주문해서 점심으로
맛있게 먹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시간이 1시 45분이었다.
버스가 바로 온다면 버스를 타고 가면 딱인데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소국님이 차로 병원 앞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하여 소국님 차를 탔다.
10분도 안 걸려서 세브란스 암병동에 도착했다. 소국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병원에 왔다.
진료 보는 날이든 CT촬영이 있는 날이든 나는 늘 혼자 온다. 혼자 다닌 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 다니는 이유는 굳이 병원 오는 일에 심각함과 무게감을 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를 둘러싼 남편, 부모님과 같은 '보호자'들이 병원 가는 날이 되면 더 심각해지곤 했다.
나는 이 심각함이 고맙기도 고맙지만 너무 미슥거렸다. 내게는 불필요한 고마움이었다.
고맙지만 거절하겠다는 'NO THANK YOU'라는 영어식 표현이 딱 맞는듯하다.
회사일에 집중해야 할 남편에게 번거롭게 왔다 갔다 신경을 쓰도록 할 필요도 없고
암병원이라고 해서 동네만 다를 뿐 소아과나 이비인후과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었다.
진료 대기실에 앉아있는 내 모습은 운동복에 크록스를 신고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꼭 시골 농부 같았다.
"김 00님. 들어오세요."
호명을 받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폐, 복부, 혈액 모두 다 아주 깨끗하고 좋아요. 지금 폐 CT 공식 판독이 많이 밀려있어서 아직 안 나왔는데요, 특이 사항이 있으면 4월 둘째 주 중으로 전화로 연락드릴게요. 암튼 제가 보기에는 다 깨끗하고 아주 좋습니다. 이제 6개월에 한 번씩 뵙는 걸로 할게요. 8월 여름에 한번 보고 1월 겨울에 한번 보고요, 내년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로 체크해 보면 될 것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별 특이 사항 없는 거죠?"
"네. 아주 깨끗해요. 모두 정상이에요. 전화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늘 진료를 보고 나오는 길은 상쾌했지만 오늘은 무슨 레몬 탄산수 마신 것처럼 톡 쏘는 상쾌함이 있었다.
원무과에서 다음 CT를 예약하고 결제를 하고 세브란스 셔틀버스를 타고 신촌역에 내렸다.
다시 전철을 타고 개화역까지 와서 공영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턱걸이하듯이 아이 하원 시간에 딱 맞춰서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고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무사히 하원시켰다.
지난 치병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 정말 많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마음에 병도 있고
마음에 약도 있다.
마음으로 수없이 죽고 마음으로 무한하게 태어난다.
마음 밖에서 찾지 말지어다.
그동안 암과의 숨바꼭질 놀이를 참 즐거이 잘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샤론스톤에게 치병은 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