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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ul 18. 2024

흰 바지를 입지 마

딸에게 가르칠 것

목사님의 "여러분, 오후에 뵙겠습니다."라는 말로 예배가 끝났다. 성가대 내 자리 정리하고 막 일어서는데 막내가 나한테로 바쁘게 걸어 온다. "엄마, 언니 피나요."


피. 아홉 살 때,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세 명이서 한 친구 잠바를 빼앗아 던져서 주고받으며 장난을 쳤다. 잠바 주인은 내놓으라고  소리는 지르지만 표정은 과히 나쁘지 않아 같이 노는 걸로 보였다. 나도 그게 퍽 재밌어 보였다. 그러나 끼지는 못했고 저만치 서서 바라만 보고 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드러내놓고 개구진 짓을 하지 못했다.  상상으론 온갖 사고를 쳐도 현실의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만치서 구경하고 있는데  한 녀석이 '훠이'하며 잠바를 높이 멀리 던졌고 그게 내 품에 떨어졌다. 잠바 주인이 나한테 씩씩대며 걸어왔다. "줘!" 라고 잠바를 우악스럽게 낚아챔과 동시에 내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아!" 모두의  행동이 멈추고 눈동자가 나로 향했다. 문방구에서 흔히 팔던 연필 깎는 칼이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었고 손잡이 부분이 아이보리 색이었다. 칼날이 얇고 예리했다. 그게 그 아이 손에 들려 있는데 부러 칼을 펴고 왔던 건지 우연인지는 모른다. 팔 안쪽, 팔목과 팔꿈치 중간 왼쪽이 깊이 길게 찢어져 살이 벌어졌다. 내 몸에서 많은 피가 흐르는 걸 처음 본 때다.


그때 엄마는 누구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게 보였다. 설령 자식일지라도. 아빠가 죽은 걸 꽤나 힘들어 했는데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이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어 놓고 무엇이 그리도 슬펐단 말인가. 일어나 앉지 못했고 숟가락을 손에 들려 줘야 겨우 두어 번 입을 벌려 먹었다. 이 피와 상처를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대로 아픈 델 부여잡고 집 수돗가로 가 피를 씻어 냈다. 옷을 갈아 있고 상처를 꽉 움켜쥐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처음엔 자는 척했는데 많은 힘을 쏟았는지 깊이 잠들었다. 아침엔 일어나선 너무 배가 고파 아침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친 걸 들키지 않으려 할수록 팔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꼭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 행동거지가 이상했는지 엄마가 불러 세웠다. 팔을 잡아 옷을 걷더니 내 엉덩이를 흠씬 두들겼다.  왜 말을 안 하냐면서. 무슨 말을 하리오.


첫 번째는 느닷없이 보게 되었다면 두 번째는 준비를 했다. 누구도 나한테 곧 피를 보게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그냥 어떤 감으로, 그래. 본능. 내 몸에 무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피와 이 피는 다르지만 피를 처리해 본 경험이 있음으로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땐 교육도 전무했고 주변에 물어 볼 여자 어른도 마땅치 않았다. 장녀였고 여자 동생은 갓 유치원을 졸업한 꼬맹이. 할머니는 글쎄, 할머니도 생리라는 걸 했을까? 너무 늙은 사람한테선 성별이 느껴지지 않는다. 옆집 아주머니께 물을 일은 아닌 것 같고. 엄마는 기운을 차리고 돈 벌러 떠났다. 어느 좀 추웠던 날, 아이들이랑 마을 회관에 모여 노는데 갑자기 자옥이가 내 귀에 "나 생리대 사러 가야 해. 먼저 간다."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 소리가 무척 반갑게 들렸다. 나도 그 애 귀에 대고 내 것도 사다 달라고 말했다. 언제 할지 모르지만 곧 닥칠 것 같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 착한 친구는 밤에 신문지로 돌돌 만 생리대를 들고 우리 집에 왔다.


여름. 나도 시작되었다. 자옥이가 사다 준 생리대를 이불장 깊숙이 넣어 뒀었다. 사촌 동생 기저귀를 본 일이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작고 얇았지만 비슷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몸에 장착할 것인가?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모르겠다. 남루한 지혜로 생각하길 몸에 붙게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게 거꾸론지는 해가 바뀌고 알았다. 피는 자꾸 밖으로 나왔다. 바지에 묻고 이불에 묻고. 공부보다 이 피를 감쪽같이 없애는 더 힘들고 어려웠다. 그렇게 지금도 거의 30년을 달마다 치르면서도 나는 아직 그 피 간수하는 일이 서툴다. 기어이 "나 생리 중이요."라는 표시를 내고야 마니까. 그럴 때마다 속으로 엄마 탓을 하는데 응당 엄마에게 배워야 할 걸 배우지 못해서 혼자 터득하느라 야무져지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고 덜렁거리는 성격을 엄마에게 돌려 버린다.


젖가슴이 맺히고 2,3 년이 지나면 피가 나온다. 큰딸이 곧 시작할 것 같아 생리대를 종류별로 사 쟁여 놓았다. 침대에 있는 딸 옆에 누웠다. "곧 피가 나올 거야. 생리대 장착하는 법을 알아야 해." 나는 비장한 목소리를 입을 뗐다. "아아, 알아 알아, 다 배웠어. 안 가르쳐 줘도 돼."라고 하며 나를 밀쳐냈다. 배우다니?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다. 참, 요즘은 별걸 다 알려주는 군.  얼마 지나지 않아 딸도 여자의 길로 들어섰다. 얘는 아주 체계적으로 잘 배웠는지 전혀 생리하는 티와 흔적을 내지 않았다.


막내 손을 잡고 예배당 앞에 앉은 딸에게 갔다. 앉아 내 얼굴을 올려다 보며 "엄마, 내 샜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엉덩이 아래쪽으로 하얀 면에 빨강 동그라미가 두 개 그려져 있다. 크기는 오백 원과, 오십 원쯤 되어 보였다. 색깔이 극렬히 대비되어 흰 바지는 더 하얗게 피는 더 빨갛게 보였다. 학교에서 이런 것까지 알아주지는 않았구나. 피가 나올 땐 흰 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고.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엄마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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