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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un 12. 2024

출근 전

화이팅

"언니, 안 자고 뭐 해?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지."


잘 자리에 누웠는데 아가씨가 전화했다. 긴장돼서 잠이 안 온다고 하니 막 웃는다. 요즘 여기저기서 이 질문을 받는데 나는 같은 대답을 했고 사람들은 웃었다. "긴장되지. 근데 내 일 아니니까 너무 재밌다. 나는 복사도 못해서 맨낭 물어봤다니까. 하하. 그런데 늙어서 실수하면 더 쪽팔리겠다. 언니, 너무 긴장하지 마. 다 그런 거야. 아, 옷 좀 사 입어."


그렇잖아도 입고 나갈 바지가 마땅치 않아서 두 개 샀다. 이것저것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으나 참을 수 있었다. 첫 월급 받기도 전에 흥청망청은 좀 부끄러우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점점 옷 욕심이 없어진다. 자꾸 늘어나는 몸 사이즈도 그렇지만 중년이라는 나이의 무게가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게 한다. 아무리 산뜻하게 입어도 내 몸은 그걸 받아 내지 못하고 사방에 붙은 삶의 때는 산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중년의 문제는 눈이다. 세상 짐은 모두 지고 있는 듯한 지치고 무거운 눈빛. 이게 모든 걸 칙칙하게 만드는 것 같다.


너무 많이 알아서, 또는 아무것도 몰라서 사는 게 두렵다.


윤석열 나이로 마흔하나. 실은 마흔셋. 취직이란 걸 했다. 4대 보험 가입하고 내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알바했을 때 사장들은 돈을 봉투에 넣어서 줬었다. 첫 아이 낳고 신생아실 유리 너머로 아기를 보는 순간 이 애 옆에만 있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렇게나 던져져 자란 아픈 어린 날이 없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꼬박 20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 옆에 만 있었다. 애들을 위한 일이라 여겼는데 핑계고 나 자신이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회복하기까지 이만큼 시간이 걸렸다. 가난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뭐,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엄마가 모이래. 언니 취직 기념으로 밥 사준다고." 밥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사 준다는 말이 놀랍다. 우리 어머니 사전에 외식은 없는 말이라. 엊그제 내가 전화드렸을 때도 출근한다는 말에 되게 좋아하셨다.  "뭐야, 그동안 본인 아들만 고생시켜 맘이 안 좋으셨나? 그러고 보니 6개월 계약직이라고 말 못 했는데 어쩌나, 실망하시겠다." "아이고, 뭘 그래. 내가 얘기했어. 그렇게 차근차근 경력 쌓는 거라고. 그리고 무슨 오빠만 고생해. 언니가 우리 조카들 키우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그거 아무나 못 해. 그것도 능력이야. 이젠 진짜 황선영의 능력을 펼 때고. 축하해."


두려운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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