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졸 Jul 28. 2024

빠이빠이

불확실한 미래

한 시 기차를 예약해 둔 터라 눈이 계속 벽시계로 갔다. 어젠 정상적으로 흐르던 시간이 오늘은 영 이상하다.  20분에서 30분까지 가는 일이 평소보다 두 배 넘게 걸렸다. 일을 마치자마자 에어컨과 형광등을 껐다. 창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주차장으로 달렸다. 운전석 문고리를 잡는데 "잘 들어가세요."라는 큰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래를 돌렸다. 찐득한 습기에 머리카락 두어 가닥이 볼에 달라붙었다. 김 선생님이다. 나는 '빠이빠이'를 하는 어린 애처럼 손을 흔들고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떼어 내며 차에 올랐다. 그와 알게 된 지 두 달.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고상한 인품이라 호감이 갔다. 그런데 사적으로 알 기회는  없었으려니와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 어른 아닌가. 그런 에게 '빠이빠이'를 하다니. 액셀을 밟는 순간  방정맞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바빠서 아니, 계산대로만 된다면 전혀 기차 시간에 지장이 없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는 인생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 초조한 것이다. 목례만 해도 충분한 걸 이 오버스러운 걱정이 원초적 반응을 하게 한 것 같다.


내가 없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순대국밥을 전화로 주문해 두었다. 11시 50분에 찾겠다고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음식을 찾아 집에 도착하면 12시 20분. 남편이 나와 막내를 역에 내려주고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넉넉히 12시 30분에 집을 나서도 늦지 않게 역에 도착할 수 있다. 목포는 코딱지보다 약간 크니까,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 준다면. 순대국밥은 이변 없이 찾았다. 집 도착 10분을 남겨 놓고 비가 쏟아졌다. 억수로. 속도를 줄이고 비상등을 켰다. 카톡 오는 진동이 계속 울린다. 신호에 멈춰 내용을 확인했다. 공부한다고 학교 간 지음이다. 우산도 없고 돈도 없어서 집에 못 간다며 데리러 올 수 있냐는 내용이다. 그 옛날 장마에 나는 비를 철철 맞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바로 남편에게 전화해 역에 내려 주고 돌아가는 길에 지음이 학교에 들리라고 일렀다. 딸이 비를 맞고 집에 오는 일은 비상사태에 해당하는 일인지 '알았어, 알았어.'를 연발한다.


비 때문에 집에 5분 늦게 도착했지만 딱 30분에 출발했다. 겨울과 여름에 한 번씩 막내랑 둘이서만 집을 떠나 1박 2일을 한다. 아이는 겨울 여행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에 디데이를 설정해 놓고 여름만 기다렸다. 비도 그치고 신호도 먹힘 없다. 화장실에 잠깐 들를 시간은 될 것 같다. 동아아파트 사거리를 통과했다. 앞 차가 속도를 줄인다. 주변 모든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엉덩이를 들고 고개를 길게 빼 앞을 내다봤다. 사고가 난 것 같다. 아. 참말로.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나에게만 순순하지 않는 세상 같다. 코레일톡 앱을 켜 다음 기차를 확인했다. 카드번호를 입력하는데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12시 55분. 역에 도착했다. 아이 손을 잡고 달렸다. 8호차 우리 자리에 무사히 앉았다. 볼이 간질거려 만지니 머리카락이 또 달라붙었다. 잊고 있던  '빠이빠이'가 생각났다. 아마 '저런 이상한 여자를 보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떼어 냈어도 그 자리가 간지러워 아까 흔든 손을 이용해 볼때기를 두들겼다. 좀 아플 정도로. 기차가 출발한다.

작가의 이전글 흰 바지를 입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