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물고기
어제 엘과 무심이 우주를 만났다. 친구의 정의를 사전에서는 어떻게 내리는지 찾았다. 우릴 친구라 불러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가깝기는 저마다 온도가 다를 것이고 오래 사귄 사이는 더욱 아니니 친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그렇다면 연인 어떤가? 연인은 하루 만에도 될 수 있는 거니까. 연인을 네이버 국어사전에 입력했다. 서로 연애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연애? 크크. 연애의 의미에 내가 모르는 사전적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검색했다.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땡땡땡!
참 해괴한 소리로군.
아무튼 우리는 만났다. 한옥을 개조한 예쁜 카페에서. 우린 늘 책을 데리고 만난다. 글과 책이 아니라면 이 지구에서 별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독서 근육이 단단하지 않은 나에겐 꽤나 벅찬 책이었는데 다 읽으니 성취감에 맘이 뿌듯했다. 우리는 공정과 상식, 다양성, 우생학, 자신감과 자존감, 교만과 오만에 대해 생각하고 물고기, 히틀러, 윤석열을 곁들였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완전한 인간은 없으며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게 공정과 상식. 또 지나친 자기애, 자신감은 독이지만 우리 넷은 자기 비하기 심하니 넷이 모일 때 만이라도 자기 내세우기를 하자고 했다. 컵에 가득이던 나의 자색고구마라떼, 엘과 무심이의 녹차라떼, 우주의 시원한 라떼가 바닥을 드러냈다. 토방에 앉아 한 컷, 능소화 앞에서 한 컷. 토방을 보는 우주의 눈이 깊게 반짝였다.
저녁을 먹긴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식당으로 갔다. 김에 싸 먹는 막회가 유명한 곳이었는데 순전히 내 취향으로 이들을 끌고 갔다. 회 서너 점을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김에 먼저 놓고 그 위에 야채를 올렸다. 내용물이 너무 많은 탓에 김의 끝이 서로 맞닿질 않아 입을 엄청나게 크게 벌리고 넣어야 했다. 알게 된 기간과 만나 횟수에 비해 너무 체면을 안 차차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엘과 무심이와 우주의 먹는 걸 흘깃 쳐다봤다. 무심이는 김이 끝이 닿게 내용을 넣고 무심하게 입에 쏙 넣었다. 회를 간장에 찍는 손놀림도 인상적이었다. 꽃에 잠깐 앉았다 날아가는 꿀벌 같았다. 매운탕에 들어있는 모든 뼈의 살을 발라 뱃속에 넣고 일어났다.
이번엔 홀이 아주 넓고 주변 산이 훤히 보이는 카페. 엘이 의지에 앉으며 "나 스타일 바꾸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살려고."라고 말했다. 엘은 자기가 말수가 많은 편인 줄 안다. 웃음이 났다.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오해하고 있을까.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일 것 같기도 하다. 엘은 목소리 톤이 아주 일정한데 높지 낮지 않은 '미' 음 정도될 것 같다. 그는 샤프한 머리로 고급 어휘를 사용해 적절한 질문을 하고 길게 남는 조언을 할 줄 안다. 적당한 자기 비하로 우릴 웃게도 하고 말이다.
근처에 천문대가 있다는 소릴 누가 했다. 별, 하늘, 우주. 왜 갑자기 코가 시큰한가. 완벽으로 가는 건 불안하다.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밤하늘까지 같이 보고 나면 그다음은 없을 것 같다.
천문대가 있는 산 위는 이미 가을이었다. 온몸을 훑는 바람의 스킨십이 달콤하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견우와 직녀별을 하늘에 두고 산을 내려왔다. "잘 가요." 가서 꽉 안아주고 싶은 정도로 헤어지는 게 싫었지만 무심하게 인사했다. 그래야 한다.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이니까. 그래야 부끄럽지 않게 또 만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