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크고 발이 작은 여자는 "요즘 좋아하는 거 있어요? 재밌고 즐거운 거요."라고 물었다. 2002년 안정환이 골든 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이긴 날. 팔이 길고 허벅지에 장미 문신이 있던 남자가 내 손목을 잡고 "무슨 색 좋아해요?"라고 물었던 후로 취향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주 오랜만이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고 "베이지요."라고 했다. 남자는 꼭 알아야 한다는 절박한 눈빛을 하고 답을 듣자마자 "베이지, 베이지"라고 입으로 두 번 되뇌었다. 눈이 크고 발이 작은 여자에게는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네 번쯤 이 질문을 받았는데 처음 두 번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 남자가 물었던 것처럼 좋아하는 색이나 음식, 연예인 같이 답이 명료한 것이 아닌 '요즘 좋아하는 것'이란 게 생소했다. '요즘 부부싸움 중이라 지옥을 맛보고 있어서 재밌고 즐거운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내버려 두었다. 여자에겐 그 남자처럼 답을 들어야겠다는 간절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가벼운 질문 하나에 느닷없이 인생을 논할 자리도 아니었다. 두어 달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여자는 또 물었다.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날 보았다. 어쩌면 꼭 알아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흰자위가 듬뿍 보이게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 요즘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내려 애썼다. 그렇지만 애석하게 또 말을 하지 못했다. 그즈음은 부부 냉전이 끝나고 평화를 맞이한 때였다. 갑자기 모든 게 싱그러워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어떤 유명인의 말이 내 입에서도 절로 나왔다. '특별한 것 없어요. 다 좋아요.'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진실 같지 않은 성의 없는 답 같았다.
9월을 목전에 둔 날, 폐장한 해수욕장에서 여잘 보았다. 대단했던 여름 이야기하다 눈이 크고 발이 작은 여자가 "요즘."이라는 단어를 꺼내길래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서 "밤이랑 콩물이요."라고 했다. 또 만나게 된다면 아주 구체적인 대답을 하고 싶어서 8월 내내 내 일상을 기웃거렸다. 더운 것 말고는 모든 게 시큰둥한 날의 연속이었다. 부디 이 여름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던 중에 설레고 기다려지는 걸 찾았다.
아무 콩물이어선 안 되고 우리 동네 '옥암칼국수'에서 서리태로 만든 것이라야 한다. 그 집 사장님은 굉장히 두꺼운 팔뚝을 가졌는데 그 때문인지 콩이 정말 곱게 갈렸다. 1리터에 만 원하는 이걸 식구가 모든 잠든 밤에야 먹을 수 있다. 묵직한 청록을 컵에 가득 따라 얼음 몇 알을 띄우고 수저로 휘휘 저어 한 입 떠 넣으면 무서운 여름을 씩씩하게 맞설 힘이 생긴다. 식구가 잠들고야 먹는 이유는 아무도 좋아하는지 않아 혼자 먹는 걸 계속 사 나르는 게 좀 뭣하기 때문이다. 떳떳하지 못할 것도, 누가 타박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행동하게 된다. 냉장고 후미진 곳에 감추어 놓고 모두 잠들 밤을 기다리는 맛이 좋다. 천천히 정성스레 한 수저 한 수저 떠서 콩물을 먹고 이를 싹싹 닦으면 깊은 밤이 된다. 낮게 코를 골며 자는 남편 옆에 가 눕는다. 그리고 살포시 그의 다리에 내 다리를 올리면 살이 닿는 순간의 감촉이 달고 짜릿하다. 그날의 고단이 증발한다. 이건 아주 찰나의 느낌인데 다리를 계속 올리고 있을 수 없어서 그렇다. 무거운지 신음 소리를 내며 이내 걷어내 버리니 말이다. 그러다 새벽녘엔 니 다리인지 내 다리인지 알 수 없게 엉켜 있다. 나는 아직 어떤 것에서도 이보다 큰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다. '옥암칼국수'의 서리태 콩물과 남편의 살이 있는 밤으로 8월을 견디었다.
이런 얘기를 눈이 크고 발이 작은 여자에게 했다. 무슨 고급정보인 양 고개를 끄덕여 가며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런 시답잖은 얘길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