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졸 Oct 30. 2024

연수와 철희


연수 장례에서 철희를 만났다.



연수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옛날 일이 떠올라 '기어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 서울 살이를 끝내고 내려왔다는 얘길 들었다. 얼굴 한번 보자 했지만 그냥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영영 못 볼 거라고는 짐작 못 했다. 소식을 전해 온 희영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니까 그 가시내가 진짜 미친년이라니까. 으이구 지랄 맞아. 새끼 딸린 년이 죽어버릴 일이 뭐가 있단 말이야?" 욕이 거침없는 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잔뜩 풀 것 같아 귓가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고 자세는 편하게 고쳐 앉았다. 연수를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알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때에 서울에서 섬마을 학교로 전학이 흔한 일은 아니다. 무슨 사연일까. "안녕, 나는 연수라고 해. 잘 부탁한다." 촌스러운 억양이 없는 단정한 서울 말씨와 새하얀 얼굴. 눈꼬리가 내려간 쌍꺼풀 없이 큰 눈에 속눈썹이 길고 풍성했다. 작고 도톰한 입술은 새빨갰는데 앞으로 조금 나와있다. 인사를 끝내고 씩 웃는데 눈이 반달이 되었다. 사랑을 주고받을 준비가 완벽히 된 얼굴이다. 남자 애들 눈에서 빛이 나는 걸 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여러 사내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숱한 염문을 뿌렸다. 연수의 연애는 꽤나 떠들썩했는데 둘만의 비밀을 온 학교가 알았다. 손을 잡았다거나 밤새 전화 통화한 일을 교실에서 화장실에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힘든 일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한 번은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는지 어쨌는지 죽겠다면서 복도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고작 2층이라 안 죽었다.




고모는 만날 적마다 "저렇게 이뻐서 우짤까."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엄청 이쁜 줄 알았는데 왜 연수처럼 인기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철희는 날 처음 알아 본 남자다. 일찍이, 연수보다 먼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연애했다. 5학년, 6학년이 속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학년을 섞어 조를 짰는데 철희랑 같은 조였다. 한 학년 아래고 사는 마을이 멀어 이름만 알았지 별로 친할 일이 없었다. 조장, 부조장을 맡았는데 죽이 잘 맞아 재밌었다. 여행이 끝나는 날 쪽지를 받았다. "누나, 누나가 예쁘고 똑똑해서 좋아. 우리 친하게 지내." 고모의 염려가 담긴 '우짤까.'가 단박에 이해됐다. 심장이 뛰고 손바닥에 땀이 잔뜩 났다. 종이를 그대로 접어 잠바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나도 철희가 싫지 않았는데 키가 작은 게 걸렸다. 2주일 뒤, 선생님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 나눠 주었다. 조별 사진에서 철희는 꼭 내 옆에 섰고 고개가 날 향해 기울어졌다. 건성으로 알던 그의 얼굴이 자세히 들어왔다. 길게 찢어진 눈에 코가 오뚝했다. 나도 쪽지를 썼다. "그래. 친하게 지내자. 나도 너 좋아." 우리는 일요일 낮, 어른들이 들에 있는 시간에 통화했다. 서로 '여보세요.'라는 말만 주고받으며 웃다 끊거나 무슨 밥을 먹었는지 묻고 답했다. 10월쯤이었고 11월, 12월까지 그게 다였다. 그러다 방학을 맞았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두어 달 사이에 어른이 된 것 같았고 국민학생 시절은 깨끗이 잊었다. 철희도 함께.




열여섯에 잠깐 알던 사이도 친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장례에 갈지 말지 고민했다. 희영이가 전화와서는 조문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며 가자고 한다. 연수가 외동인 줄 몰랐다. 이혼했는데 아이들은 전남편이 키우고 같이 사는 남자가 있었으나 재혼한 사이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구나.




장례식장이 외곽이라 밤 운전이 무서워 남편과 같이 갔다. 희영과 주차장에서 만나 얼른 조문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거의 도착했는데 희영이 전화 와 일이 늦어진다며 먼저 조문하고 가란다. 혼자 들어가기 뻘쭘해 남편을 옆에 세웠다. 연수의 영정 사진 앞에 섰다. 눈꼬리가 내려간, 쌍꺼풀 없이 크고 속눈썹이 풍성한 눈이 반달이 되어 있다. 연수는 여전하다. 그 앞에 국화를 놓고 돌아서니 상복을 입은 껑충한 남자가 서 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전남편일까, 지금 남자일까. 너무 궁금한데 물을 수가 없다. "누나." 나를 부르는 건가? "선영이 누나 맞죠? 나 철희예요." 아, 전과 같이 얼굴이 하얗고 눈이 길에 찢어지고 코가 오뚝했지만 키는 나보다 훨씬 크다. "누나는 안 자랐네요."라며 웃는다. 음식이 놓인 상으로 우릴 데려간다. 남편이 의자에 먼저 앉았고 나도 그 옆으로 가려는데 철희가 먼저 앉아 버려 나는 맞은편으로 갔다. 내 남잘 소개했다. 철희와 남편이 악수한다. "나도 결혼해서 애가 둘이에요." 보람상조 유니폼을 입은 아주머니가 밥과 육개장을 가지고 왔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며 연수랑 무슨 사이냐고 무심한 척 물었다. "몰랐구나, 우리 사촌인데. 연수 누나 중학생 때 섬에 내려왔잖아요. 그때 우리 집에서 지냈어요." 철희와 2년은 같은 중학교를 다녔을 텐데 기억이 없다. 소주 뚜껑을 열며 남편에게 권한다. 이이는 괜찮다며 병을 받아 철희 앞 잔에 술을 따랐다. 단숨에 들이켜더니 연수 이야기를 풀었다. 소주 한 병이 금방 비었고 얼굴과 목이 시뻘게졌다. 눈물을 쏟는다. 점점 몸이 남편 쪽으로 기울더니 곧 어깨를 완전히 기대고 꺼이꺼이 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얘를 말려 줄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누나, 우리 속리산 간 거 기억나요?" 혀가 많이 꼬부라졌지만 '속리산'이 정확했다. 누가 들으면 단 둘이 간 줄 알겠다.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과 주고받은 쪽지가 머리를 스친다. 나는 얼른 나가자고 남편을 재촉했다.

작가의 이전글 9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