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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an 05. 2025

뻘낙지 선물

맘에 들어요?


탕탕이 하기 좋은 크기로 낙지를 스무 마리 샀다. 아버지 생신이라 다 모인다. 남편은 장남이고 아래로 동생 둘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여섯 식구, 동서네, 아가씨네 각각 넷. 둘이 출발해 열여섯이 되었다.


도착하니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이다. 우리를 기다리는지 거실에 불이 환하다. 현관을 여니 따뜻한 온기가 먼저 맞는다. 새끼들 온다고 종일 보일러를 켜 놓은 게 분명하다. 어머니와 아가씨가 어서 오라고 인사한다. 조카들도 일어나 허리를 구부린다. 많이 자랐다. 다들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리 자랐는지. 덩치가 커져 집을 가득 채우니 방과 거실이 전보다 좁게 느껴진다. 재잘재잘 너무 시끄럽게 해서 제발 조용히 하라는 소리만 하다 헤어진 적도 많았는데. 지금은 한 방에 모여 있으면서 각자 핸드폰만 붙들고 있다. 그래도 어찌 이리 사랑스러운지. 어느 날 사라져 버린 179명의 사람들 때문에 더 시큰하게 다가온다. 방마다 사람이 가득이라 되는대로 베개와 덮을 이불만 가지고 아무 데에 몸을 뉘었다.


부스럭거리는 기운이 느껴져 눈이 떠졌다. 머리맡 핸드폰을 더듬어 시간을 보니 여섯 시 조금 넘었다. 어머니는 다섯 시면 하루를 시작하시는데 우리 때문에 불도 못 켜고 화장실만 다녀오신 듯하다. 나는 잠을 더 청했다. 좀 더 밝아진 기운에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다. "지성 엄마야, 일어날 수 있겠니,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허리 아프다야." 자식들 실컷 자라고 본인 허리 아픈 것도 참고 계셨다니. 에고. 아버지 방으로 갔다. "누구여?" "아부지, 저예용."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었다. "우리 매느리고만, 등 좀 긁어줄텨?" 나는 아버지 등 뒤로 가 러닝셔츠를 걷어 올리고 손가락을 오므리고 조금스럽게 긁어 내렸다. 우리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어떻게 밥 먹고 사냐고가 첫 질문이다. 이렇게 살찐 나에게 밥이라니. 들을 때마다 민망하다.


아버지와 한참 웃고 떠들고 나가니 어머니와 동서가 밥상을 차리고 있다. 회무침, 간장게장, 꽃게무침,  엘에이갈비, 갖가지 김치에 각종 밑반찬. 언제 이걸 다 하셨을까.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위가 깜짝 놀라겠다. "아이고, 먹잘 것도 없다. 지성 엄마야, 애들 깨워라. 밥 먹어야재."


밥상을 물리고 아가씨가 커피 주문을 받는다. 커피를 앞에 두고 거실에 식구가 둘러앉았다. "느그 아부지가 말이여, 지난 번에 나랑 좀 투닥투닥했거든. 그랬는디 내가 자기 괄시했다고 다 지성이한테 이른다고 하질 않더냐. 애들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를 좋아한대요. 참말로 그라냐? 이 참에 한 번 물어봐야 쓰것네. 지성아, 할아버지가 좋냐, 할머니가 좋냐?" 지성이는 빙그레 웃는다. 다른 손자, 손녀들 입에서 말이 터져 나온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다. 할머니는 어지르면 야단을 하셔서 무섭지만 용돈을 잘 주고 요리를 잘 하셔서 좋고 할아버지는 사랑만 주셔서 좋긴 하지만. '하지만'에서 말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아가씨가 돈을 할머니가 줄지 모르지만 재산은 다 할아버지 명의라고 하니 애들이 눈이 커진다. 하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모두 입장을 확실해서 설날 만나기로 했다.


잠깐 웃고 떠들었는데 열두 시가 되었다. 남편이 낙지가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연다. 아직도 찐득하게 살아있다. 밀가루를 잔뜩 뿌려 빠득빠득 씻는다. 낙지를 보고 아이들이 모여든다. 징그럽네, 불쌍하네, 귀엽네, 맛있겠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얇은 다리 하나를 뚝 떼 입에 넣어 주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맛있다고 엄지척을 한다. 도마에 낙지를 가지런히 펴고 묵직한 칼을 찾아 탕탕 두드린다. 두들겨 패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먹고 싶은 맘이 좀 사라진다. 난도질을 당한 낙지.


점심 상은 낙지가 가운데를 차지했다. 역시 목포 뻘낙지 아닌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모두 숨죽이고 낙지를 흡입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큰 새언니, 이거 한 마리 얼마예요? 시상에 돈 많이 써겠네."

"뭘, 이거 아빠 생일 선물이에요. 다른 건 없어. 하하. 아부지, 이번에 낙지만 준비했어요. 맘에 드시죠?"

"글씨, 좀 약한 것 같은디."

어머니가 "약하긴 뭐가 약하다고 그런댜, 이걸로 식구들 몸보신했으면 되았지. 이보다 큰 선물이 어딨어유."라고 한다. "아따, 농담도 못혀. 웃자고 한 소리여! 우리 매느리 고마워."


열여섯 명이 한바탕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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