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1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남편과 산책 다녀오고 씻은 뒤 좋아하는 과일 깎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 이야길 써도 될까, 발행된 글을 읽었을 때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게임 끝판왕을 깬다는 각오로 마음속 깊이 넣어뒀던 이야길 적어본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 아빠는 집을 나갔다. 새 사랑을 시작한 아빠는 엄마와 언니, 나, 동생을 버리고 떠났다. (처음이다. 이렇게 내뱉은 건) 아빠가 떠난 우리의 집은 힘들어졌다. 당장 학교에 낼 급식비가 부족했고 문제집 살 돈이 없었다. 어떤 날은 차비가 없어 집 밖을 못 나간 적도 있다.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들었지만 엄마의 노력으로 우리는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대학까지 입학했다. (당시 집안 형편으론 대학 갈 상황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남들 다 가는 대학, 너도 가야 한다며 등떠밀었고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나는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마트를 시작으로 식당, 카페, 공장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입학 후엔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교수님의 도움으로 시급 높은 근로장학생을 했고 장학금까지 받았음에도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내가 생활비와 등록금을 감당하며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친구들과 엄마에게 카페 사장님이 되기 위해 바리스타 일을 배운다며 그만두겠단 이야기를 하며 학교를 나갔다. 당시엔 먹고사는 게 바빠 몰랐는데 학사모 쓴 동기들을 보니 핑계를 대며 학교를 그만둔 21살의 내가 불쌍해 눈물이 났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작한 바리스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카페 아르바이트로 경력을 쌓으며 정직원을 알아보던 중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당시 엄마의 상태를 짐작한 나는 정신과 상담을 권했지만, 자존심 강한 엄마는 자신의 상태를 부정했다.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쓰러졌다. 쓰러진 뒤 병원에서 수많은 검사를 했지만, 병명을 알지 못한 채 퇴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는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
엄마는 공황장애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과정 동안 나는 무차별적 언어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땐 당연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분노를 퍼부었고 분노와 욕설이 끝나면 울었다. 짧으면 십분 길면 한두 시간, 소리치는 엄마가 무서웠다. 핸드폰에 엄마 이름이 보이면 그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아무도 오지 않는 골목길에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볼륨을 가장 낮추고 들었다. 볼륨 조절로 엄마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내 가슴속에는 엄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메아리치는 목소리는 곧 상처로 변했고 내 마음에 아주아주 크게 박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계속 받았다. 전화가 익숙해질 무렵엔 같이 화내고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갔다.
수많은 전화 중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통화가 있다. 당시 엄마는 남동생과 가게를 운영했는데 둘 사이 불화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다. 웃기지 않는가, 똑같은 자식인데 아들에겐 사랑과 행복의 좋은 감정을 주고 딸에겐 슬픔과 분노의 나쁜 감정을 버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는 펑펑 울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제발 그만하라고, 집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울고 빌었다. 끝이 없는 긴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엄마와 연을 끊는 게 더 빠르겠다, 생각할 때 엄마는 드디어 자신의 공황장애를 인정했다. 몇 년에 걸친 언어폭력이 멈췄고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사랑하는 우리 작은 딸, 밥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