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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Oct 11. 2024

20살, 첫 번째 해방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가 연속극 보는 사이 창문 너머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기차 타기 전 엄마에게 전화 걸어 말했다. '나 일하러 가. 한 달 뒤에 갈게' 당황하는 엄마 목소리 뒤로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학창 시절 나는 항상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라 엄마가 필요했다. 엄마에게 욕을 들어도 뺨을 맞아도 미성년자인 나는  10시가 넘으면 집에 들어가야 했다.


성인이 되는 날 꼭 독립할 거라 생각하며 버틴 학창 시절, 드디어 기회가 왔다. 바로 공장 아르바이트!

수능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공장 아르바이트가 유행했다. 식사와 숙소 제공은 물론 한 달 일하면 1학기 학비를 벌 수 있다. 서둘러 신청했고 다음날 당장 올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일 가겠단 답변 후 전화를 끊고 나니 오후 4시. 경기도행 막차 시간까지 6시간 남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짐정리를 시작했다. 당장 필요한 물건은 책상 밑에 숨겨둔 채 밤 10시가 되길 기다렸다. 밤 10시 연속극이 시작되면 엄마는 1시간 동안 TV 앞에만 있다.


연속극 시작과 함께 나는 바닥에 얇은 여름 이불을 깔고 최소한 생계 물품을 던져 봇짐을  쌌다. 짐을 싼 뒤 TV 소리가 시끄럽다는 핑계로 안방 문을 닫고 나갈 타이밍을 노렸다. 현관문은 소리 나니까 조용히 창문 너머 기차역으로 향했다. 당시 살던 집이 오래된 주택이라 창문 너머 나갈 수 있었다.


동대구역 도착 후 엄마에게 전화 걸어 말했다. '나 경기도에 일하러 가. 한 달 뒤에 봐' 혹시나 엄마가 달려올까 핸드폰 끄고 기차에 올라탔다. 한 달간 일하는 곳은 온양온천 인근 공장. 새벽녘 오산역에서 내린 뒤 첫차 시간까지 편의점 앞 화로에서 추위 녹이며 기다렸다. 10년도 훌쩍 넘은 시간이라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딱 하나, 정확히 기억하는 게 있다. 바로 엄마에게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첫차 타고 도착한 곳은 인력 사무실. 앳돼 보이는 얼굴에 사기당할까 센 척했지만 사실 무서웠다. 영화처럼 장기가 털릴까 무서웠고, 잘 못 된 계약으로 평생 여기서 일해야 할까 무서웠다. 밤새 걱정한 고민과 달리 사무실 직원들은 친절했고 나의 봇짐을 본 직원분은 놀라며 서둘러 숙소에 데려다주셨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피로를 녹이며 하루 쉬고 다음날 새벽 공장 셔틀버스를 탔다.


한 달간 일하게 된 공장은 대기업 하청업체. TV 뒤편에 들어가는 프레임을 검사하고 알코올로 닦아 소독하는 작업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면장갑을 겹겹이 껴도 알코올이 장갑을 파고들어 손끝이 시렸다. 라텍스와 면장갑, 낄 수 있는 장갑은 모두 꼈지만 손이 너무너무 시렸다. 손도 시리고 점심시간밥은 아주 맛이 없었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힘듦보다는 재밌던 순간이 더 많이 떠오른다.


기차값 들고 와 근무 시간 외 숙소 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즐거웠다. 가져온 수건이 한 장이라 한 달 내내 눅눅한 수건에 몸과 머리를 말리고, 여름이불 한 장으로 찬바람 막느라 매일 추웠지만 재밌었다. 12시간 주 7일 일하고 숙소비, 공과금, 소개비 등 생각지 못한 비용이 지출되며 100만 원 후반으로 벌었지만 괜찮았다. 성적이나 대학 혹은 잘난 어른이 되어야 한단 말 대신, 오늘 점심은 무엇인지 구내식당인지 도시락인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어떤 꿈을 이룰 것인지 ‘나’와 ‘오늘’에 집중하며 보냈기에 편하고 행복했다.




원치 않던 인문계 진학으로 3년 내내 절망과 불안 속에 살았다. 자퇴하고 싶었지만 부모님 동의가 필요해 그러지 못했다. 무엇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10대를 보내다 스무 살 처음으로 내 의지로 선택했다. 숨통이 트였다.


광활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한 달 뒤 오아시스는 사라졌지만 난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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