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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Sep 22. 2024

78. 모든 것은 내 마음

-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느껴지는 대로.


갔다 왔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두 가지 생각을 한다.

하나는 ‘감방’, 다른 하나는 (여성의 경우) ‘시집’.

맞지 않을까? “갔다 왔지.” 하면 떠오르는 곳(장소?).


갔다가 잘 왔으면 된 거지.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은 딱히 정해져 있진 않다.

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잘 왔으니 되었다.




퇴직, 퇴사... 머릿속이 하얗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 그만 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과장과 그 편을 먹은 무리들을 보는 게 장이 뒤틀리는 느낌만큼 고통스러웠다.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길어졌다.


‘(나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새로운 압박을 주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자존심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전문성이 없는 전문가’ 집단, 즉 공무원 사회에 질려 있었고, 어떤 자리에서도 자존심으로 버틴단 소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다고 던져 버릴 게 많지도 않았다.

사람이 악한 것이지, 일은 소중했다.

나를 그렇게 만들고 나서 즉시 표정을 갈아끼운 자들이 우르르 뒷방으로, 그들의 아지트로 몰려 다니는 걸 묵묵히 지켜 봤다. (Feat: 이제 만족해?’ )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남(상사, 동료, 민원인, 그리고 가족들 포함)에게 뻗쳤던 신경의 레이더가 센서부터 파괴됐다. 전파를 보낼 수도, 감지할 수도 없게 망가졌다.


사람 하나가 사회적 관계에서 파멸하는 데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삽시간에 무너진 것은 영향력 있는 집단에 속하지 않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쉴드칠 방패가 돌연히 창이 되서 나를 가해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

어제까지의 동료가 오늘은 적이 됐다. 묘한 일이었다.

물론 그들은 어제도 ‘동료’가 아니었다. 나만 몰랐다.


또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봤다.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비켜 갈 수가 없었다. 이미 포위된 상태여서 여기서 살아 나간다는 게 기적과 같이 느껴졌다.

나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하자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읽고 알아차리는 데에는 세상 제일 혼란한 과정과 큰 고통이 들어갔다.




불편한 것은 내 리듬과 다르게 춤을 추어야 하기에 그런 것이다.

건강을 챙겨야 하는 날들은 챙기지 않았던 날들보다 분명히 길다.

사람들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서 분석하는

대인관계 기술은 조금씩 회복 진행 중이다.


그런데 불편한 신호가 있다.

첫째는 ‘대동아 전쟁’ 신호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개전할 때 일본이 우두머리니까 자신을 따라서 서구 국가와 싸우자는 뜻으로 ‘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나만 믿어라.’가 너무 안 믿어진다. 이게 내가 문제인가?


생각해 봐도 돈 주고 매 맞는 식이라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몰릴 때 조용히 나와야 할 것 같기만 하다.

언제 나갈 것인지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이 대목에서 카톡의  나오기 기능에 ‘(조용히) 나오기’‘신고하고 나오기’보다 많이 선택될 거란 생각을 해 봤다.


카톡 단톡방 조용히 나가기 :: 그냥 ‘Leave'

두번째 불편한 신호는 ‘새마을운동’이다.

세대에 따라서 불고기, 김치찌개 먹는 ‘새마을식당’은 알아도 저런 운동이 있나 하실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명분을 걸었던 저 운동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재활을 하고 있다. 각종 벙개(즉석모임)를 제안하고 치맥, 등산, 마라톤 등 뭐든지 동참하라는 내용으로 참여자들을 진작시킨다.

새벽 별을 봐도 찬양, 저녁 달을 봐도 찬양이다. 결국 ‘잘 사는’ 방법은 영웅 한 사람만이 안다.

여기까지만 말해 본다.


네이버 쇼핑에서 ‘이장님 모자’로 판매되고 있는 새마을운동 캡


세 번째의 불편한 신호다. 그건 바로 사람을 만나고 가까워지는 데 ‘돈’이 오간다는 것이다. 자본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에는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방법이 있어 왔다.

어느덧 무료는 유료가 될 것이다. 그렇게 흘러들어간 돈이 멘토의 새로운 종잣돈이 될 것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는 어느새 남에게 끌려다니면서 그들의 생활을 따라하게 된다.

들으라는 것을 듣고

생각하라는 것을 생각하고

찍어 주는 데로 세상을 본다.


원래 사람의 고유성은 자기 자신을 대단히 만족시킨다. 누구나 참고는 할 수 있겠지만 남의 말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남의 돈 버는 도구가 되거나 필요를 충당하는 재료가 되어선 안 된다.


좋은 멘토는 사람을 놓아 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고를 줄 안다.

방법을 공유하되 사람을 함부로 ‘추앙’하게 만드는 분위기는 반드시 ‘돈’에 연관되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온라인으로 사람을 보고 인연을 만들었다면

굉장히 많은 모임에서 ‘묻지마 오프’를 갖는다. 꼬약꼬약 나가 본다.

모임을 가졌을 때는 나의 역량이 상승하는 것 같지만 다시 집에 돌아온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날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


또,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극히 자신을 과장하거나 허세도 부린다는 점, 그러나 그에 눌려서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어서 어깨가 삼 센치 정도 내려가는 사람 역시 모임이 도움 안 된다.


‘갔다 왔다’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놓지 말고 ‘관심사’라는 끈을 꼭 잡고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뽑아 쓸 내용만 추출한 후

나머지는 버리자.

커피를 추출한 후 여과지째로 다 버리듯이 그렇게 하면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자신이 왜 이 모임에 오게 되었는지 ‘본분’을 잊어버릴 수 있어서,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초라해 보일 수가 있어서

자극과 동기를 부여받으려고 했다가 자존심 스크래치만 얻어 올 수 있어서

사람들을 멀리 해 본 적 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란 것을 알면 된다.

내공 생기면 다시 모임에 나가고

힘이 붙으면 더 멀리 달리면 된다.

사람을 보는 눈이란 게 어차피 무수한 ‘경험’에서 길러진다. 많이 만나야 가려진다(가려낼 수 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다발 말을 쏟아낸다. 분명히 정신이 없다. 적극적인 사람들이 이밴트를 만들어 초대한다. 노하우라는 것들이 산처럼 쌓인다.

근데 아무리 좋은 이름을 달더라도 억지로, 당위처럼 느껴져서 참가한 모임에서는 내가 어차피 빼 먹질 못하고, 오히려 먹히게 된다.


그러니까 준비하고 뛸 것.

준비가 되었는지는 내 마음에 물을 것.

갔다 와서는 마음 정리를 잘 할 것.

누구도 내 대신 살아주지 않고 대신 해 돌라꼬(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한번 갔다 오면 다음엔 갈지 말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즉 고민하지 않고 가거나, 고민 없이 안 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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