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두려움이 가장 두렵다
아르헨티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느 것이 축구이고, 제일 유명한 사람은 리오넬 메시일 것이다. 옆나라인 브라질만 봐도 흑인이나 짙은 피부색을 가진 선수들이 많은데 유독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대다수가 유럽계 백인들이다. 1900년대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르헨티나로 이주를 많이했고, 아르헨티나는 지금과 달리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기 때문에 이민을 장려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아서인지 아르헨티나 스페인어에 이탈리아인들의 억양이 많이 반영되어 있고, 길거리에 피자집들이 정말 많다.
아르헨티나는 농업 대국이다.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물가상승률을 보이고 최근 2개년은 물가상승률이 200% 이상일 정도로 이 나라는 매년 망가지고 있다.(2015년 당시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광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농산물(밀, 대두, 옥수수)과 축산물(소고기) 덕분인데, GDP의 15%, 수출의 50%에 해당한다. 수입품 가격은 올라가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자국민들에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플레이션이 높은 나라는 달러를 가져가서 여행하면 정말 저렴한데, 아르헨티나는 치안도 괜찮고 볼거리도 많아서 여행자에게는 좋은 여행지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첫 발을 내딛은 곳은 바로 체 게바라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에 내린 첫 날 꿈에 그리던 남미에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남미 여행의 국민루트가 있다면 그것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작해서 페루의 리마에서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한인 호스텔도 있었고 배낭여행자들이 많았다.
쿠바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다. 생김새를 봐도 알겠지만 우리가 아는 피부색이 짙은 라틴아메리카 사람이 아니고 그냥 백인이다. 남미에서 피부색이 백인에 가까울 수록 사회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현상을 검색해보면 영어로는 pigmentocracy라고 한다.) 페루, 에콰도르같이 인디헤나(남미 원주민)들이 많은 나라에서도 지나가다 사립 대학을 잠시만 들어가봐도 백인들이 많은 걸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부의 계층이 몇 백년째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체 게바라는 집안은 꽤나 유복했고 아버지는 병원장이었으며 본인은 의대생이었다. 어느 날 친구이자 선배였던 알베르토와 함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와 볼리비아를 거쳐 아마존 지역을 넘어 베네수엘라까지 여행을 하게 되고, 이것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보겠다는 체 게바라의 혁명가로서 인생에 불씨를 지핀 사건이 되었다. 어찌보면 당시 해외여행도 어려운데 아르헨티나라는 괜찮게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면, 체 게바라의 인생역정은 아르헨티나가 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내가 10대에 읽었던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 체게바라 평전이었고 그것이 남미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나에게 의미있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후에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곳인 이과수 폭포와 엘 칼라파테를 갔다. 이과수 폭포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브라질 쪽과 아르헨티나 쪽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쪽이 더 이쁘고 좋았던 것 같다. 엘 칼라파테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러 가는 곳으로 빙하라는 그 하늘색 존재만으로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아르헨티나 살타에서 한 뜬금 없는 번지점프였다.
볼리비아를 넘어가기 전에 국경 도시인 살타라는 동네가 있었다. 딱히 뭐가 유명한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뭘 보러가는 관광지가 아니고 사람 사는 도시를 한 번 가보고 싶어서 갔다. 그냥 시장가서 밥 먹고 동네 구경도 하다가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축구팀 유니폼을 샀다.(잘 입고 다니다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밤에 호스텔에 앉아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참 신기한게 거기까지도 와서 놀고 있었다. 저녁에 고기도 사서 구워먹고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냥 뭐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무심코 물어보았다.
"살타에 뭐 하러 오셨어요?"
"여기 번지점프 하는 데가 있데요. 그리고 엄청 싸다고 하던데요."
역시 신기한 도시를 다니는 한국인들은 뭔가 소소하지만 범상치 않다.
왠만한 액티비티는 다 해봤는데 그 중 안해본 게 번지점프였다. 스카이다이빙은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해봤고, 패러글라이딩은 네팔 포카라에서 해봤기 때문에 나름 액티비티에 자신감에 차 있었다. 번지점프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도 같이 가보기로 했다. 수민이라는 친구는 한국에서 자세교정, 물리치료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 직업에 프라이드가 있는 모습이 멋있었고, 왠지 그런 친구는 따라가도 실패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아르헨티나는 그래도 중남미에서는 꽤 발전된 나라에 속해서 구글 지도에 나오는 버스를 타고 가니 찾아가기가 쉬웠다. (반대로 저개발 국가로 갈수록 정해진 노선의 대중교통을 식별하기 어려운데 볼리비아를 가보면 그냥 지나가는 승합차에 물어봐야 어딜가는지 안다.) 살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65km를 가면 cabra corral 댐이 있고, 거기에 인공호수가 있는데 각종 액티비티들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다리에서 번지점프를 뛰는 거였는데 높이는 40~50m 정도로 생각보다 다리가 높지 않아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두 팔 벌려 멋지게 점프하는 내 자신을 상상했고, 수민이라는 친구는 그렇게 먼저 뛰었다.
어렸을 때 연예인들이 번지 점프하면서 막 울고 불고 하는 내용들이 있었다. 왜 그런지 이해를 잘 못했다. 그런데 그 때 그 이유를 알았다. 아래를 보니까 선뜻 뛰기가 겁이 났다. 사람이 이 정도 높이에서 공포감을 많이 느끼는 이유는 높이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떨어졌을 때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멋지게는 못 뛰었고 바보같이 주저 앉으며 떨어져 버렸다. 뛰다라는 표현보다 떨어진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막상 발을 뗀 순간부터는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지만 뛰기 직전까지 내 인생의 가장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었다.
사람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무섭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차라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경험자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보이는 두려움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원하는 대학에 가서 행복한 나 자신을 생각하는 기쁨보다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의 나 자신을 생각하는 고통이 더 컸다. 주변에 재수생, 삼수생들이 있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좀 더 가시적인 두려움이었다.
남미 여행도 생각해보면 첫 발을 내딛기가 가장 어려웠다. 남미는 위험한 곳이라고 하며 가끔 나오는 사건 사고를 보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곳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내 친구들은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맞는지 한 편으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보이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뛰어야 할지 망설이며 번지점프대를 서성이는 사람 같았다.
인생은 번지점프와 같아서 망설이다가도 결국 해보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비슷했고, 너무 위험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남미도 다른 여행지와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한 일주일 정도 동네 사람처럼 돌아다니다 보니까 너무 편해졌다. 한 달 정도 되었을 때는 특별한 여행지를 가서라기보다 그냥 날씨 좋은 날 동네 식당에서 밥 한끼 챙겨먹고 산책할 때가 가장 좋았고 그때서야 남미가 정말 편해졌다고 느꼈다.
첫 여행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느꼈다. 보이는 두려움 너머에는 언제나 익숙함, 편안함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