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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담 Feb 02. 2024

다정을 미루지 않기

 [ 엄마~ 운동 새로 시작하는데 내가 선물 하나 해주고 싶어! 뭐 필요한 거 없어? ]

 [ 말만 들어도 넘 고마워 ]


엄마가 새롭게 운동을 시작한댔다. 종목은, 라인 댄스! 우리 엄마는 몇 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 일을 일 년 쉬어야 했을 정도로 허리가 안 좋았다. 그 전에 꾸준히 하던 필라테스도 수술 이후로 못 했고, 한두 시간은 너끈히 걷던 체력이었는데도 오래 걷는 게 무리가 될 수 있다는 의사 조언에 따라 하루 삼십 분도 채 걷지 못 하는 생활을 몇 년 이어나갔다. 그러던 엄마가 새해를 맞아 다시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쉰이 넘었으니 새로운 댄스 스텝 배우는 게 쉽지는 않을 터. 계속 당신만 틀려서 속상하다고, 따로 레슨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짠해왔다. 내가 카톡으로 물었다. 옷이나 신발 뭐 필요한 건 없냐고,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다고.


며칠 후 만난 엄마가 그랬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그게 너무 뭉클한 거 있지. 느이 아빠는 라인 댄스 시작한다니까 한 달에 얼마 하냐고만 묻지, 뭐가 필요하냐는 말은 없더라.


필요한 거 생각해서 알려달라고 한 지 이 주도 더 됐는데 아직 엄마로부터는 감감무소식이다. 뭘 사줘도 기뻐하시겠지만 가장 진한 기쁨은 누군가 나를 위하고 챙겨주고 싶어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 아닐까?


이렇게 보면 마음 씀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음식도 제철 음식이 더 신선하고 맛있는 것처럼, 마음도 전해야 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전해야 한다.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상관 없다. 카톡과 전화만 있으면 어떤 마음이래도 다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작년 가을이었나, 친구 생일이 카톡 상단에 떴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바빠서 일 년에 몇 번 못 보지만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친구라서 이 날은 카톡 선물하기 대신에 냅다 전화를 걸어봤다.


부모님이 주변 분들에게 안부 전한다고 전화하는 모습은 옆에서 많이 지켜봤지만 전화보단 현란한 카톡 이모티콘과 모바일 기프티콘이 더 익숙한 세대라, 별다른 용건 없이 정말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으로만 전화를 걸어본 건 처음이었다.


어, OO야. 너 생일이어서 생각 나서 전화했어. 생일 너무너무 축하해!


솔직히 전화를 걸기 전에는 이런 생각이었다.


' 얘 생일날 나 아니래도 즐겁게 놀고 있을 텐데, 너무 오버하나? 아님 내가 방해가 되려나?'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전화기 너머로 친구가 너무 고맙다며, 전화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며 정말 좋아하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 순간 정말 전화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여태 이 좋은 걸 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생일 때는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주인공으로서 누군가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어보니 알겠다. 생일도 대부분의 날과 똑같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하는 그 단란한 시간에, 멀리서도 너의 태어남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너의 안부가 궁금한 누군가가 있다고 전해줌으로써 단란함을 더 보태준다면 배로 기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행복하다면, 그 덕에 내가 더 행복해지니까 결국 '제철 다정'을 건네는 일은 내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다정, 하니까 또 하나. 최근에 만난 S가 떠오른다.


S는 연수를 받으러 갔다가 만난 대학 동기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인사만 하고 지나쳤던 사이인데, 연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같은 연수를 듣고, 또 같은 조에서 활동을 해서 학부 때는 몰랐던 모습들도 많이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S는 내가 여태껏 만나온 사람들 중 손에 꼽도록 자상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친구를 왜 대학교 다닐 때 못 알아봤지? 그때 더 대화해볼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날 만큼.


연수를 받는 동안 날이 너무 추워 롱패딩을 입고 있으면 아무렇게나 뒤집어진 패딩 모자를 말없이 다가와 바로 해주고, 먹을 게 있으면 주변에 있는 누구에게나 '이거 먹을래?' 물어본다.


별 거 아닌 친절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물음에는 같이 나눠 먹고 싶다는 표면적인 의미뿐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려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종류의 뭉근한 따뜻함이 녹아 있었다.


연수를 받다가 어딘가로 이동할 때도 꼭 '같이 안 갈래?' 물어보고, 바빠 보이면 '하던 거 하다가 나중에 올래? 이따 보자' 하고 인사하는, 주위를 잘 챙기는 세심함이 S에겐 있었다.


그러나 S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둘이서 대화를 할 때 더욱 강하게 들었다. 대화를 할 때 그 친구는 항상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 말에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건 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말을 들을 때도 자신이 할 말을 의식하거나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때문에 순도 백 퍼센트의 경청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나조차도 그렇고.


그런데 그 친구와 대화할 때면 별 말 아닌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다른 대화와 어떻게 달랐느냐 물어보면 설명할 길이 마땅치는 않지만.. 내 느낌에는 그랬다. 그래서 이 날은 집에 와서 일기에 썼다. S의 마음씀이 느껴져서 고마운 하루였다고.







어느덧 연수는 막바지에 다다라, 조원들끼리 각자가 가진 성격의 장점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S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신한다는 느낌이 드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줘요.


그 순간에 S에게서 느꼈던 따뜻함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내게도 설명되었던 것 같다.

진심으로 듣고, 진심으로 살피는 것. 그래서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이 필요로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그게 S의 다정함이었다.


잘 듣기야말로 얼마나 어려운가, 이 자기 PR의 세상에서. 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어하지 남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래왔고.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으로부터 또 하나 배운다. 다정을 제때 건네고,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 친구 말고도 연수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장점들로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배울 것이 많은 나에게 그런 인연들이 안배된 것에 감사한다. 내가 건네는 다정의 폭 또한 그로 인해 더 넓어졌기를 바라며, 1월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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