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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률 Jan 14. 2024

[영화 리뷰] 위시(2023)

100주년 축하를 유예하게 된 사연


 1923년 설립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이 유영하는 자유로운 세계, 동화적인 내러티브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역사적인 첫 번째 더빙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와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애니메이션 산업 발전의 마중물이 되어 영화사의 한 장을 채웠다.


 이러한 성취를 떠올릴 때 디즈니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위시>에 특별한 기대가 모이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제작사 또한 마찬가지. 군데군데 오마주를 심어놓으며 관객의 추억을 자극한다. 비극은 그런 관객의 기대와 제작사의 노력이 잘못 엇갈리는 지점 위에 이 영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 2023.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나라 '로사스'. 그곳에 사는 '아샤(아리아나 드보즈)'는 100세 생일을 맞은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평범하고 활기찬 10대 소녀다. 존경받는 왕이자 소원을 이뤄주는 강력한 마법사인 '매그니피코(크리스 파인)'는 아샤가 왕국의 비밀을 알아차리자 금지된 마법을 풀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사람들의 소중한 소원을 지키기 위해 아샤는 자신의 간절한 부름을 받고 찾아온 '별'과 아기 염소 '발렌티노(앨런 튜딕)', 그리고 친구들과 힘을 합쳐 매그니피코에게 맞선다.


 권선징악으로 이어지는 동화가 그렇듯 <위시>의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이야기 사이사이를 채우는 건 지극히 '디즈니스러운' 설정이다(아버지를 여읜 당찬 주인공과 사악하고 강력한 마법사, 동화를 읽듯 진행되는 액자식 구성, Happily ever after로 이어지는 결말 등). <위시>의 이야기가 공략하는 지점은 이러한 익숙함에 맞닿아있는 안정감이다. 과거의 유산에만 천착한다는 비판이 예상되는 대목임에도, 영화가 차지하는 기념비적인 위치를 고려할 때 스크린 위로 배어나는 기시감을 섣불리 단점으로 확정 짓는 일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오히려 관객의 정보 처리를 최소화시키는 이 영화의 드라마트루기는 넉넉한 여유공간 속에서 캐릭터들이 마음껏 활약할 여지를 남긴다. 그러니 제작자의 바람이자 <위시>를 보는 정석적인 관람태도는 늘 그랬듯 사랑주기 마땅한 캐릭터와의 첫 만남을 기대하는 쪽일 테다.


© 2023.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 평이한 이야기 위에서 <위시>의 캐릭터들은 무미건조한 매력을 뽐낸다. 아샤는 인류애 넘치는 성정이 돋보일 뿐 다른 디즈니 주인공에 비해 현저히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답지 본 듯 문제를 해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호기심이 동할 관객은 많지 않다. 아샤의 친구 '가보(하비 길렌)'는 모티프(<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심술이)가 된 캐릭터를 변주 아닌 답습할 뿐, 츤데레 콘셉트가 철이 지났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이외 나머지 친구들도 서로 다른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성이 희미하다. 원본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샤의 친구들이 몇 명인지는 아마 맞힐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개성을 만회하려는 듯 몇몇의 등장인물은 요령부득의 행적을 보인다. 빌런인 매그니피코는 그동안의 태평성대가 불만이었던 듯 소원의 비밀을 아샤에게 늘어놓는다. 중반까지 매그니피코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아끼지 않던 왕비 '아마야(안젤리크 카발)'는 사실 왕위 계승을 바라왔던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리낌 없이 남편을 마법 속에 유폐시킨다. 쿨함과 뻔뻔함을 왔다 갔다 하는 캐릭터들의 행동은 유쾌함보다 우스움을 남긴다.


 또한 금지된 마법의 강력함은 빌런의 허언으로 밝혀지며, 위기의 순간 아샤로부터 시작된 전 국민 단위의 돌림 노래는 그 힘의 원리를 끝까지 알 수 없다. 이같이 치밀함보다 비약을 중시하는 화법은 몇 개 없는 사건의 봉우리들을 단순히 점과 점으로 연결해 버리며 이야기의 굴곡을 평평히 다져놓는다. 플롯의 결핍을 가리기 위해서일까. 새삼스러울 게 없는 디즈니 캐릭터들의 과장된 표정과 부산한 몸짓은 이번 작품에서 유난히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다양함과 다양성

 비백인 주인공인 아샤에게는 전술하였듯 난쟁이들의 성격을 따와 만든 다양한 외모의 친구들이 함께한다. 지혜와 선의로 소임을 다하는 '달리아(제니퍼 쿠미야마)'는 안경을 쓰고 목발을 짚은 동양인으로 묘사된다. 아샤와 그의 할아버지 '사비노(빅터 가버)'를 비추는 투샷에서는 둘 사이의 인종적 차이가 도드라진다. 다양성의 함의를 숨기지 않는 이 영화의 캐릭터 디자인은 의미가 있는가? 있다. 유의미한 과업이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중요한 건 다양함은 다양성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양성의 가치는 우리 생태계가 그렇듯 숲과 산을 빈틈없이 메꾼 수많은 서로 다른 종들의 상호작용, 그 역동성이 창발하는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자기만의 서브플롯을 구사하지 못한 채 아샤를 좇기만 하는 캐릭터들에게 인물 간의 상호작용과 역동성을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캐릭터의 다양함은 다양성의 필요조건 하나를 충족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젠더 측면에서 권위적인 남성인 매그니피코에 대한 수동성을 극복한 왕비 아마야의 행적은 (그것이 설득력 있는지와는 별개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예술적 도전을 감수하지 않는 이 영화의 소심한 연출 때문인지 제작사 스스로도 그 성과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두마육

 <위시>가 비인간 동물을 연출하는 방식은 의미심장하다. 염소 발렌티노는 별에게서 얻은 목소리를 활용해 매그니피코의 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차갑게 말해 말들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하등 관계가 없다. 이때 발렌티노는 가축이 가축을 도와야 한다는 기묘한 논리로 말들을 설득한다. 만약 그 논리를 따른다면 말들이 아샤 일행을 돕는 이유를 동물들 간의 끈끈한 동지애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아기 염소 발렌티노가 난데없이 중년 남성의 거친 목소리를 내뱉을 때 정작 그는 동류가 아닌 마부와 겹쳐 보인다. 특히 발렌티노는 영화 내내 유아복을 입고 다니는데, 결말에 이르러 느닷없이 주변을 향해 '옷'의 유용성을 외친다. 이를 그가 일종의 인간화를 완료했다는 선언 같은 장면으로 설명하는 건 과한 해석일까.


 아샤 일행이 우연히 연 방문 뒤로 수 십 마리 닭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지휘봉을 쥔 발렌티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닭들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그 뒤 방벽에는 다닥다닥 붙은 닭장들이 위아래로 들어차 있다(이 노래의 제목이 "The Happy Chicken Song"인 점은 정말 아이러니다). 그때를 시작으로 영화는 닭의 등장마다 알을 낳는 쇼트를 이어서 삽입한다. 결말 즈음 마법 지팡이를 하사 받은 아샤는 실수로 닭을 거대화하는데, 이 영화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음 장면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자기만큼 거대한 알을 낳는 가축의 기능성 홍보 정도다. 실제로도 그랬다.


 <위시>는 동화적인 연출로 동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선심을 보이지만 그 목소리는 인간이 원하는 대사와 액션을 선택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활용된다. 특히 별이 부리는 마법의 원리가 대상이 간절히 원하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을 틔워 동물과 인간이 소통하게 만드는 장면은 훨씬 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소통의 결과는 무엇인가. 목소리를 얻지 못한 가축은 스스로를 항변하지 못한다. 개성 대신 동물의 기능성에만 천착하는 이 영화의 태도는 디즈니가 외쳐온 사회적 구호가 위선임을 의심케 한다.


© 2023.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아샤의 집이나 숲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을 포함해 수채로 칠한 듯한 2차원의 배경 위로 3D로 렌더링 된 캐릭터가 움직이는 장면은 자주 눈길을 끈다. <위시>의 서사적 목표가 디즈니 이야기의 원형을 복고시키는 것이었다면, 시각적 목표는 과거와 현재의 원만한 결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뷰의 디아블로를 메이플스토리의 사이드뷰로 플레이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공간감은 영화의 몰입을 거듭 방해한다. 횡으로 움직이는 캐릭터의 이동 방향을 Z축의 심도로 바꾸는 편집 습관은 그 자체로 특기할만한 것이 아님에도 혼종의 시각 디자인과 만남으로써 눈에 피로감을 더한다.


 영화는 로사스의 성 위로 반구의 궤적을 그리는 별을 비추며 끝이 난다. 디즈니 인트로를 오마주한 이 장면이 가장 마지막에 있다는 건 다음 영화의 시작을 기다려달라는 디즈니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이 긍정보다 부정에 가까운 건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셀지 위를 떠나지 못했던 근면하고 열정적인 애니메이터들의 유산을 이 작품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은 예술을 향한 도전이 있는 날, 나는 그날을 기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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