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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여행준비

사람 변하기는 하나보다

by 단새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다.

기나긴 연휴를 맞아, 약 3주 전 급히 여행을 결정했다.

여행에 굶주린 친구 한 명을 꼬드겨, 급한 예약 탓에 다소 비싼 항공권과 숙소를 감내할 만큼 여행에 미친 친구와 3일 만에 모든 예약을 마치고 드디어 출발 전날이다.


최근 3년간의 여행 전날이면 늘 캐리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게 된다.


"습... 이게 다 챙긴 건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구나.

참으로 대조되는 십 년 전의 캐리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의 첫 해외여행에 대한 기억은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갔을 때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두 번째였지만 첫 번째는 삼촌네 집에 간 것이었으므로 예외로 하겠다.


그때의 나는 지극히 계획적이고 통제적인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의 예민함이 채 사라지기 전, 대학생으로서 다소 성숙하기 전.

어릴 때의 성질머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까칠한 학생이었다.


여행 타입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계획표를 빡빡하게 채우는 편.

현지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생생히 떠오를 만큼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동선을 모두 고려해 하루하루치 일정표를 모두 상세히 짜두고 플랜 B, C도 마련해 두는 사람이었다.

그땐 지금처럼 여행 커뮤니티가 활발하지도 않았고 애플리케이션이 다양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유디니에서 정보를 얻고, 위시빈으로 상세한 동선을 체크해 가며 25일간의 여행일정을 떠나기도 전부터 빽빽이 짠 뒤 하루 2만 6 천보씩 걸으며 유도리없이 다 실천했었더란다.


캐리어도 당연히 가득. 기념품 공간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3/4는 꽉꽉 채워 가곤 했다.

소, 중, 대 파우치에 종류별로 짐을 정리해 공간 활용을 높이고

상비약, 영양제, 옷과 여권 같은 필수품 외에도 하나하나 다 인쇄한 여권 사본, 예약 확인증, 또 식성이 맞지 않을 것을 대비한 통조림 음식과 블록국 등등...

26인치인지 28인치 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당시 나의 근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수준이었던 것은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단 체력이 받쳐주는 스물한 살만이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긴 하다.

(이때 돌길바닥에 무거운 캐리어를 이고 지느라 급성 디스크를 얻었던 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략 스물다섯 전까지의 여행은 비슷했던 것 같다.

멀리 가든 가까이 가든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일정표를 짜고, 동선을 체크하고, 만일의 만일까지 대비한 짐을 싼다. 숙소와 교통편도 당연히 미리 다 예약하고 떠나는 편.

나중이 되니 어느 정도였던 고 하면, 조사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처음 가본 여행지임이 분명함에도 몇 번은 와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정도였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행을 떠나지 못한 시간이 길었던 적이 있다. 아마 전 국민이 그랬겠지만.

몇 년 만에 찾아온 기나긴 자유시간에 유럽여행을 다시 떠나기로 했다.

다소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출국 열흘 전에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으니까.


26인치 캐리어를 꺼내 펼치고, 준비물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짐을 쌌다.

이때 조금 생각했다.

'어... 나 사람이 조금 바뀌었나 본데?'



짐을 잔뜩 챙기기 싫어졌다.

핸드폰, 여권, 차키, 에어팟. 여기서 차키 대신 여권. 사실 이것만 있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다.

물론 그새 세상이 좋아진 덕이 크다. 예약을 확인하기도 편하고, 실식간으로 정보를 조회할 구석도 많아졌다.

더 이상 만약의 만약의 만약에 대해 불안에 떨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만 된다면 어느 정도의 돌발 상황은 해결이 가능하고, 다소 즉흥적인 여행도 수월한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변한 것은 나의 입맛도 마찬가지라서 컵라면, 블록국, 고추장에 다소간의 공간을 할애하긴 했으나

그 외의 짐으로 채워진 공간이 캐리어 절반뿐이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약이 1/4긴 했네... 좀 많이 변했네.)


현지에서의 모습도 꽤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숙소만 대략적으로 정해두고 세세한 일정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한인 민박 호스트분이 야경투어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일에 바로 투어에 참가하고,

소규모 근교 투어에서 만난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기도 하고,

호스트분께 주워들은 또 다른 근교로 떠나는 기차를 그날 아침 표를 구매해 가기도 했으며

또 그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과 하루종일 동행하기도 했다.


5년 전의 내가 이 여행을 그대로 마주했다면 과연 같은 여행을 했을까?

아마 이 많은 우연과 변칙의 근처에 다가가는 것부터 꺼렸으리라.

이때의 여행에서 난, 전에 겪어보지 못한 즉흥적인 여행의 짜릿함과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유연함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평소 삶에 대한 통제적인 태도도 다시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다시, 구마모토로 떠나기 전날 밤.

캐리어 안에 캐리어를 넣는다. 아무래도 지난 여행에서 수하물을 추가 구매했던 경험이 반영된 선택이다.

짐을 줄이기 위해 같은 옷을 두 번씩 입는 선택을 했더니 더더욱 단출해진 옷가방, 렌즈, 최소한의 기초화장품, 약, 충전기, 여권... 그리고 카드. 최소한의 짐을 채워 넣었다. 기내용 캐리어에 넉넉하게 다 들어간다.


진짜 다 챙겼나? 세 번째 확인은 하고 있지만, 안되면 현지에서 구매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다.

환전도 해두지 않았건만 이 또한 현지에 가서 세븐일레븐 ATM으로 뽑으면 되니까 싶다.


재차 세상이 발전한 덕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해도 되지 뭐~라는 여유가 생긴 것 또한 분명하다.



해외여행 10년 차, 사람이 변하기는 변하는구나 싶다.

이번 여행에서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이제는 조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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