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일수록 불안은 힘을 잃는다 | 만다라트
지난 주말, 나는 대전으로 향했다.
만다라트를 쓰기 위해서였다.
만다라트란 무엇인가?
만다라트는 일본 디자이너 이마이즈미 히로아키가 개발한 창의적 사고 도구로, 목표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조화된 도식이다. 중앙에 목표를 설정한 뒤 이를 둘러싼 8개의 서브 목표를 세우고, 다시 각 서브 목표마다 세부 계획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흔히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오타니 쇼헤이가 작성한 만다라트가 대표적인 예다.
나 역시 그 만다라트를 본 적은 있어서 대략적인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 만다라트를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함께 만다라트를 작성하기 위해 강첨 코치 유니스님, 몇 년간 만다라트를 써온 디자이너 쏘님을 만났다.
나는 그 사이 유일한 만다라트 초보였다.
'그래서 만다라트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죠...?' 라며 얼타고 있던 나에게
두 분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었다.
"줄글을 단계별로 구조화해도 좋고, 정량적인 목표 대신 감정이나 가치를 담아도 괜찮아요."
작성 중간에 떠오른 고민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면, 그게 또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되곤 했다.
우리의 만다라트 시간은 느슨하면서도 심도 있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각설하고, 나는 어떻게 썼느냐?
노트북이라도 있었으면 줄글을 마구 쓴 다음 구조화하는 방식을 택했을 테지만
아이패드밖에 없으니 머릿속으로 깊이 고민하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가장 중앙에 한 단어부터 적고 시작했다.
안정.
요즈음의 나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 있다.
'뭘 하고 싶어?'
커리어, 콘텐츠, 사적인 영역까지 모든 면에서 열망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지난여름의 무력감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아마도, 완전한 해결이 아님에도, 취업이라는 큰 불안 요소가 일시적으로 해결된 덕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올라온 것이리라.
이것이 결코 나쁘다고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나는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었다.
'아, 지난 한 해의 나는 상당히 불안했구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이따금 어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으레 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그때의 난 정말로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야 하는데 너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그러했고. 정말이지, 취준생이라 말하면서도 채용 공고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지원하지도 않았기에 스스로 낭창하기 그지없다고 여겼다.
주변에서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라고 위로했지만, 정작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것보다 회사 밖 프리랜서 라이프를 맛보는 데 더 몰두하고 있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들 새도 없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다라트를 쓰며 그때를 되돌아보니, 그 모든 에너지가 사실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 바삐 움직이느라 불안을 느낄 새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2025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싶은가?
가만히 앉아 골몰하던 머릿속에 떠오른 딱 한 단어가 그것이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지?'
구체적인 질문이 떠올랐고, 만다라트를 한 칸 한 칸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직장'이라는 울타리와는 별개로 이리저리 바삐 활동하던 나는 어딘가 한구석 불안했나 보다.
어쩌면 지난 한 해, 나의 창작의 열망은 불안함에서 왔구나.
내 배움의 원천은 결핍에서 왔구나.
내 행동하지 않는 느긋함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왔구나.
그렇게 오랜만에 가진 이 소속감이라는 안정을 즐기는구나.
그렇게 잠시 나에게서 열망이 떠나갔구나.
별안간 많은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이 떠올랐고, 그때부터 만다라트를 한 칸 한 칸 채워나갈 수 있었다.
건강, 직장, 주거와 같은 뻔한 것부터 돈, 콘텐츠, 인스타툰과 나에 대해 탐구하는 것까지.
한 자 한 자 적을수록 채워지는 단어들은 내가 일상 속에서 어디에서 안정을 얻고 싶은지, 어떻게 찾아나갈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2025 나의 만다라트는 한 칸을 일부러 비워두었다.
올해를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채워질 공간으로 남긴 것이다.
남은 빈칸은 올해를 살아가며 내가 찾고 만들어갈 답으로 채울 것이다.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채울까 하는 생각도 있다.
어찌 되었든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싶었다.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가며 채워가면 될 뿐이다.
처음 써본 것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뭐랄까... 생각보다 그리 특별한 것이 필요하진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는지도 몰라 불안했던 그 시간들에 비해 나의 삶이 안정되기 위해 필요하려나 싶은 것들은 하나하나 그리 대단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는지도 모르던 그 시간들에 비해, 지금의 나는 나의 삶을 안정되게 할 작은 조각들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그거면 됐다 싶다.
결국 안정이란 흔들리는 삶 속에서 잠시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자리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쉼표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아마도, 만다라트 위의 칸칸이 적힌 단어들이 그 여정 속에서 최소한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