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생일을 잊어버렸다.
나는 생일을 참으로 좋아한다.
이유는 없지만 유독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자기 생일을 유독 특별히 여기는.
그런 것 치고 유난스레 파티를 한다거나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 스스로 이날 하루를 그리고 4월 한 달을 조금 더 각별히 여길 뿐이다.
마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벚나무를 제일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번 달, 태어나 처음으로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완전히 까먹었다.
마음의 여유가 그만큼 없었음이다.
왜 이렇게까지 여유가 없었지..? 회고하고 싶어졌다.
(미뤄진 브런치북에 흐린 눈)
일에 너무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자면, 나는 현재 계약직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넉 달을 채우고 다섯 번째 달을 보내고 있는 지금,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폭발하고 있다.
근무 환경은 정말 좋다.
연구소 특유의 독립적인 분위기, 수평적인 문화, 함께 일하는 좋은 상사분들, 그리고 높은 파티션(?)
휴가를 쓰는 것도 자유로운 편이며 사람 만날 일 없이, 아주 가끔은 하루 종일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날도 있다.
단 한 가지 단점이라면 내가 너무 무능력하다는 점이다.
연구원의 업무란 무엇인가? 굉장히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석사를 졸업한 계약직에게 주어지는 업무는
사실상 대학원생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분명 다른 점이 있다고 매일 듣고는 있지만 체감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잇다.
본인의 트레이닝이 목적이 아닌 결과물 생산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일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이 집단에서 가장 멍청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진실을 매 숨 쉬는 시간마다 마주하는 것은
대학원 때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제일 멍청이야. 이 생각이 나를 박사로 진학하지 않게 만들었고, 2년이라는 공백기 동안 다른 진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연구 현장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2년 전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왜 니 발로 네가 가장 멍청해지는 곳에 들어갔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내가 너무 바보라는 점만 빼면 이곳은 참으로 좋은 곳임에도 말이다.
아무튼 이 한 달은 실험을 하고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많은 실험과 분석을 진행했지만
실험 설계부터 검증, 결과 도출까지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조언을 구하러 박사님께 갈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구체적인 피드백과 더불어 '나는 어쩜 저것의 반의 반도 스스로 못 떠올린 걸까?' 하는 자괴감이었다.
한 달 내내 이것은 반복되어, 출근해서도 퇴근해서도 숨을 쉴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오곤 했다.
그런 하루하루로 시작된 4월이었다.
아니, 당신 방금 일을 한다면서요?
그렇다. 이 직장 내에서 다른 직군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최종 결과는 기다리는 중이나, 어쨌든 한 달 동안 서류를 내고, 필기를 치고, 면접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해는 말길 바란다. 나의 상사분들도 다 알고 계신다.
오히려 작년부터 공고를 잘 지켜보라고 먼저 말해주신 분은 나의 직속 상사이시다.
어쨌든 앞서 말했듯, 나의 일이 옳게 진행되는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전형을 진행한다는 것은 굉장한 피로가 동반되는 일이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잘해야 하는데... 하는 기분.
그 와중에 어? 서류 됐네.
어라? 필기는 왜 붙었지....?
면접... PT면접이라니.......
그렇게 지난주 말쯤에야 모든 전형이 끝났고, 최종 안내를 기다리고 있다.
어쨌든 굉장히 노력한 만큼 붙기를 바라고 있다. 그 결과를 기다리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은 굉장한 단점이지만... 그래도 그 힘들고 정신없는 와중에 최선을 다한 만큼 잘 되길 바라는 건 당연한 마음이다.
이러나저러나, 4월 한 달 동안은 꽤나 정신없이 힘들었다.
자가가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사는 집에 계속 살려면 전세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이 부분을 계속 알아봤다.
다른 월세집으로 이사 갈까? 이왕 대출을 받을 거라면 다른 전셋집도 알아볼까? 아니면 본가로...? 아...
여러 선택지가 많았지만 집에 대한 고민은 선택지도 많고, 따질 것도 많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고려하기에 나의 4월은 어떠한 여유도 없었다.
평소 물건을 사거나 결정을 하기 전 최대한 많은 불안요소를 고려하는 사람이 나다.
무엇이 장애물일 될지, 따져봐야 할 것 중 미처 놓치는 것은 없는지, 잠재적 위험요소는 무엇인지
스스로도 피곤할 정도로 따지고 고민하곤 한다.
지나친 고민이 단점이면 단점이었지, 그 끝에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체력이 다하면 모를까
어쨌든 하나하나 파고들어 따지고 보는 것이 나의 타고난 천성이다.
그런데 이 달은 그러기엔 나의 여유가 없었다. 체력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무엇 하나 없었다.
선택지를 본가 복귀, 월세, 전세 연장 세 가지로 줄이고 사악한 월세값을 확인한 후 전세대출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빠르게 결정을 했음에도 계약에는 고려할 것이 너무나 많으며
나의 불안정한 직장 상황으로 인해, 필수 거주 기간을 줄이기 위한 특약을 합의해야 했고
그 와중에 계약서가 잘못 작성되어 재작성을 하는 등 부동산과 실랑이하는 일도 많았다.
참.... 살던 집을 전세계약하는 것도 이렇게 피로한데
전혀 모르는 동네의 전혀 모르는 집들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예산과 현실을 조율하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상상조차 하기 싫어졌다.
원래도 내 집, 내 공간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한층 더 간절히 바라게 된 시간들이었다.
막상 적고 보니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4월은 시작부터 현재까지, 하루하루가 정신없고
초조하기 그지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4월의 말이 다가오며 하나하나 일들이 마무리되어 가며
적어도 퇴근 후만큼은, 주말만큼은 머리를 비우자는 스스로의 다짐이 통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내일 출근하면... 잘 정리되지 않는 결과에 머리를 쥐어뜯고
또 준비되지 않은 결과공유발표를 미룰 수 있는지 눈알을 굴리고 있겠지. 굴려야겠지.
그 상상만으로도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지만
이렇게도 치열한 한 달도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날 여유로워져 있을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이 회고를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