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살아지니까 사는 것일까에 대한 고찰
새벽 2시에나 할 법한 질문이 낮 2시, 커피 한 잔에 떠올랐다.
내 삶의 끝은 어디일까? 내 삶의 미련은 무엇일까.
미련이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마음 속에 남은 무언가라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삶의 미련이라는 것은 가장 쉽게 이해하기로, 삶이 끝날 때 나를 더 살고싶게 할 무언가가 될 것이다.
반대로 뒤집으면 내가 살아가게 할 원동력.
내가 무언가를 위해 살고싶게 만든다 라는 그 '무언가'.
'그냥 태어나니까 숨쉬고 먹고 잠자고 돈벌고 사는게 아니라면, 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현대인이란 살아 숨쉬는 그 자체가 돈이 드는 행위라서 돈을 버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다.
어찌되었든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손에 쥐어 본 적도 없이 폰의 숫자로만 접하는 그 0과 1들이 나를 먹고, 자고, 쉴 수 있게 한다.
반대로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의식주를 영위하기 어려워진다.
몸뚱이 하나 기댈 부모님댁이 있다 한들 그 안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결국 돈은 필요하다.
내 의지대로 먹고 입고 놀려면 내 의지대로 부릴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
그럼 나는 잔고가 남아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일까?
이 숫자가 0이 되면, 내 몸 기댈 장소마저 사라지고 나면 어떨까? 어떤 기분이 들까?
당연히 우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겠지.
단기일용직이든 금융지원을 알아보든 당장 먹고 살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겠지.
근데 사실 살면서 진짜 잔고가 0이 되어본 건 용돈을 받던 학창시절 이후엔 잘 없을 것이다.
아마 내 나이쯤 되면 대체로 자취를 하며 약간의 저축이 있거나, 또는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근로를 하며 다달이 돈을 벌고 있을 수도 있고 당장 소득은 없더라도 등 기댈 현금이 조금은 있는 쪽이 많겠지.
정말로 당장 오늘 먹고 살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현금을 벌겠다고 뛰어다닌 경험도
내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런 경험은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다수일 것이다.
부모님이 말하던 '너넨 절박함이란게 없어.'의 그 절박함을 느낄 경험이 이런 것이라면
정말로 없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명확히 떠오르는 모습이 없다.
당장 돈이 다 떨어졌을 때의 내 모습.
뭐, 돈이 떨어지는 걸 지켜보는 시점에서 전전긍긍 불안해한 경험까지야 있으니까 그건 상상이 되는데
그 이후는 솔직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아직 등 기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일지도 모르지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반대로 '그럼 나는 오로지 이 잔고를 채워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가?' 싶었다.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한 건 요즘이라면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붙잡고 물어봐도 알 일이지만
정말 의식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리 살아야지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그리 물어본다면 딱히 그정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려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죠. 수준의 너무 당연한 생각이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돈이 중요한 건 맞는데 내가 이걸 위해 살아간다고 느낄 정도로 중요하게 와닿는가?
그리 물어본다면 딱히 그정도도 아니라는 심드렁한 감상만 돌아오는 것이다.
당연히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이 또는 넉넉하게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 후회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쉽게 생각하면 가족이나 친구 따위.
온라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니 게임 속 지인들도 포함시킬까. SNS로만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미련은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사람을 얻고 잃는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감정을 선사해 주는 일이라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쉽게 울컥하게 될 것이다.
최근 굉장히 큰 화제가 되며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경험해본 우리네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상황을,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느꼈을
그 수많은 사사로운 감정들을 공감될만한 형태로 풀어내서 반응이 뜨거웠다.
그만큼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관계를 맺고 다채롭게 살아가지만 또 한편으론 한결같은 삶들을 살아내고 있다.
뭐, 모두가 그럴 것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는 접어둔다면
우선 나는 사람이 들고 나는 것에의 감정 소모가 심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을 넓고 두루두루 사귀기 보다는 좁고 깊은 나의 작은 바구니 속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쏟는 편이라서
그 안에 사람이 하나 들고 하나 나는 것이 굉장히 큰 감정소모의 이벤트가 된다.
내 바구니는 그 벽이 보통 마음의 벽보다는 두껍고 높아서
한 번 바구니에 들이는 과정은 길고 어려워도 한 번 들어온 사람을 쉬이 내보내지도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밀도 있는 중단기동안 깊게 맺은 인연이라면,
즉 바구니 바닥에 잠들어있는 사람들도 어찌되었든 내 사람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어느순간 누구의 잘못 없이 연락이 끊긴 뒤 수년만에 다시 연락이 오더라도 그런 사람들까지는
마치 어제도 연락한 마냥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성향의 내가 어릴때부터 소꿉친구도 사귀어보고, 어쩔 수 없이 넓고 얕은 친구들도 만들어 보고,
죽고 못사는 단짝도 만들어 보고 그런 단짝들에게 왕따도 당해보고 결국 내 결에 맞는 사람을 찾아도 보고
가볍게 지나갈 줄 알았던 인연과 십년도 만나보고 십년지기가 될 줄 알았던 사람을 가벼이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참, 사람에 많이 흔들리는구나 했던 것 같다.
감정 소모도 많이 해봤고.
그럼에도 커가면서 조금은 무던해지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과 내 노력으로 안되는 영역을 인정하게 되면서 사람을 대할 때 에너지 소모가 점점 덜해짐을 느꼈다.
구구절절 말이 많았지만 여기까지로 보면 어쨌든 사람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참 큰 부분을 차지한다.
좁고, 매번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심지어는 집밖엔 잘 나가지도 않아서 그리 활발히 만나지도 않지만
작고 소중하기 때문에 더욱 매번 조심스레 신경쓰게 되는 사람들만 곁에 남게 되었다.
그만큼 더 신경 쓰며 살고, 한 번이라도 더 조심스레 닦게 되는 건 사실이다.
고이고이 보관하는 보석들처럼.
그럼 이 보석들이 내 삶의 가장 큰 미련이 될 수 있을까?
우습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리 구구절절 나는 참 사람에 휘둘리고 감정소모가 크다 말해놓고도.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내 감정소모가 큰 인생의 이벤트들은 결국 '남이 나에게 오고 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내가 먼저 사람이 싫다거나 손절한다거나 등돌린 적이 없다.
수동적인가. 수동적이다.
학창시절 친구들도 생각해보면, 난 가만히 앉아있는데 누군가 나를 친구로 점지하면 그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돈에 대한 상상과 비슷하게 내가 먼저 떠나가는 상황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럴 때의 감정도 뭔가 잘 떠오르지 않고.
그러니까, 내 삶의 끝에 사람이 미련이려면 이 사람들과 더 오래 알고 싶다던지
또는 못해준 것이 떠올라 후회되거나 그런 감정이 들면 미련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떠나갈 때가 되면 그게 소용이 있는 것일까? 라는 딴지 거는 듯한 생각이 톡 튀어나오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떠오르거나, 못해준 것에 대한 후회는 들 것 같은데
그게 내 삶의 미련이겠느냐 물어보면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는게 지금 드는 생각의 최선이다.
나를 떠나보낼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역으로 상상해 볼 수는 있겠으나
이건 또, 그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거니까.
다양한 가슴아픈 생각들을 상상해 볼 순 있겠으나 사람 사이는 쌍방이 아니라서 그 모든 생각들은
결국 나의 망상일 뿐일 확률이 더 높으니까.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생각해 봤지만
또 이렇게 적어내려가면서도 생각해 봤지만 딱히 결론내려진 건 없다.
돈, 사람...그 외에 어떤 요소가 더 있을 수 있을지 당장 떠오르지도 않고
특히 사람에 대한 건 나도 내 생각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일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못해본 게임이나 못 본 영화들 역시 큰 미련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 대답은 결국 못 찾았다.
그럼 진짜 내 삶의 미련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이 아쉬워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없어서 그 생각의 끝은 죽음뿐이라고 했는데
왜 그런지는 짐작이 가능했던 오늘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삶에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쪽이라, 이 질문들에서 시작해
하나 둘씩 내가 미련가질 요소들을 더 찾아보고 싶어지긴 했다.
뭐 하나라도 찾고, 다만 이번 1년이라도 그걸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