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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가이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써봤다.

이키가이는 대체 찾을 수 있는건가

by 단새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뭘 잘하는 걸까’
‘이걸로 돈이 될 수 있을까’
‘그게 세상에 필요한 일이긴 할까’


이런 말들을 예전부터 자주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진지하게 분석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 질문이 떠오르면 조금 생각하다가 금방 피곤해졌고 다시 일상에 묻혔고

때로는 검색을 해보다가 금방 덮었다.


나란 사람은 결국 이런 걸 뾰족하게 정리하진 못하나 보다 싶었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살았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그 유명한 ‘이키가이’라는 프레임을 써봤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돈이 되는 것, 세상에 필요한 것.

이 네 가지 기준을 가지고 그동안 해봤던 일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 예전부터 막연히 끌렸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활동들까지 몽땅 다 쭉 적어봤다.


채우기 엄청 어렵더라. 그렇지만 또 쓰고보니 생각보다 목록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하게 나열한 글자들의 집합 같았는데, 보다 보니까 자꾸 내가 보였다.

내가 어떤 활동에 자주 끌렸는지, 어떤 순간에 유난히 몰입했는지, 반대로 어떤 일들은 늘 미루고 망설였는지 그런 게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좋아한다고 적은 것들은 거의 다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사진 찍고 요리하고 여행 다니고 이런 것들.

뭔가를 느끼고 표현하고 경험하는 일들.

막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끌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 손이 갔던 것 같다.


예전엔 그게 그냥 취향이겠거니 했는데, 써놓고 보니까 이것들이 내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감정이 주체가 안 될 때마다 그런 방식으로 해소해온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반면 잘한다고 적은 것들은 좀 달랐다.

사람들이 한 이야기든 일이든 흐름을 정리하고, 초보자 눈높이에서 설명해주고,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도와주고, 복잡한 걸 간단하게 만들고, 뭔가 흐릿한 걸 명확하게 바꿔주는 일들.

이런 게 나한텐 꽤 익숙한 일로 나왔다.


특히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도와줄 때 더 잘됐다. 나는 그게 참 이상하면서도 재밌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완전히 따로 노는 기분이었고, 그게 잠깐은 좀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번엔 다르게 보였다. 항상 느끼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 교집합이 참 없다 싶은데

그래도 이 둘 사이를 이을 무언가가 없을지 ChatGPT 프롬프트로 탐색해볼 수 있어서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글쓰기 같은 것에, 정리하고 구조화하는 능력을 더해보면

새로운 뭔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그 밑에 질문을 붙여서 자기 이해를 돕는 툴킷을 만든다든지,

감정별로 여행 코스를 짠다든지, 혼술 안주를 감정에 따라 큐레이션한다든지.

어쩌면 좀 뜬금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섞는 상상을 해보는 것 자체가 꽤 신났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뭔가 애매하고 흐릿한 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상황이든 감정이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든.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 뭔가를 정리하고 구조화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도 안정을 찾았고, 그런 방식이 남한테도 도움이 됐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더 선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흐릿한 감정이나 시작 앞에서 질문하고 정리하면서 길을 만들어주는 사람. 그게 딱 내 역할 같았다.


물론 아직 완성된 이키가이는 아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겹치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고,

어떤 활동은 좋아하지만 돈은 안 되고, 어떤 일은 돈이 되지만 재미없고...

예전에도 이키가이를 써보려 했지만 돈 되는 일 쪽에서 되게 막혔는데 이번에도 그건 여전했으니.

또 어떤 일은 세상에 의미 있어 보이는데 내겐 어렵고, 그런 식이다.


그래도 그런 활동들이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꽤 의미 있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적어도 지금 이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고민이라도 해봤다는 게 의미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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