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 사건으로 살아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평범했던 일상에서 지옥 같은 일상으로 바뀌어 살아가겠지만 주님을 알고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는 기회가 없습니다. 실제 사고로 죽음을 맞이 한 당사자야 말로 가장 어리둥절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시지 않고 없다면 피해자의 죽음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피해자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은 성경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성경은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들어지고 운행되고 있습니다. 생명마다 역할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역할을 마친 후에 소멸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며 법칙입니다.
생명들 중에서 특별히 사람만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고 귀하게 여기시며 소멸되지 않도록 만드셨습니다. 동물과 식물이 사고로 죽고 소멸했다고 하여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억울하다는 이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분노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악착같이 손해보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사고로 죽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분명히 적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시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을 의심 없이 믿은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고 할 때 죽이시고 셋째 하늘 아버지 우편에 앉히십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알고 있지만 다른 길로 가고 있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더 멀리 가지 못하게 죽이십니다.
고린도전서 5장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남은 날 동안 보시고 하나님의 뜻인 사람의 구원을 방해가 되는 사람도 죽이십니다.
여호수아 7: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하나님이 생명을 죽이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방해가 되면 예수님을 믿어도 죽게 된다는 사실이며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죽임에 대상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데리고 오르셔 우편에 앉히시니 사람이 보기에 억울하겠지만 생명의 주권자 하나님에게는 별다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악인들은 왜 일찍 죽지 않는지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구원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끝은멸망하겠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악행으로 피해를 보고 병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았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착한 생명으로도 일하시고 악한 생명으로도 일하십니다. 선하시다는 것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네가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과 형편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말씀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고민하여 나의 구원을 위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들의 슬픔과 아픔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 사치 일 만큼 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슬픔은 없애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노력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을 설명해 주는 책은 성경 외엔 없으며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신비이며 창조주만의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고 생명까지 잃게 한 가해자가 그리스도 안에 살면 피해자를 위해 또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것을 한다는 것은 환난과 고난이 따르는 삶을 살게 되지만 마땅히 그것을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한 순간에 삶이 무너져 내린 피해자가 그리스도 안에 살면 자신을 위해 아주 조금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자로 축복받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41-42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누가복음 12장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화해시키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이 원수 된 것을 화해시킴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도 화해시키는 능력으로 오셨습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5:18-19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한 생명의 죽음을 누구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앞에 있는 고통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죽음 앞에 고통은 두렵기 때문에 두렵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두려워 떨며 땀이 핏방울 될 만큼 극심한 고통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웠던 것이 죽음이었을까요? 육신의 고통이었을까요?
저는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육신의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이 가두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으며 그것을 알아도 육신은 고통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두었으니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도록 사람을 지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빌리보서 1장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전도서 7장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당신이 오늘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기회가 아직 남아있는 증거이며,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구원의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