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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이 Apr 24. 2024

안 돼요 파이집

오래 유지하는 비결

파이집에는 문의가 많다.

혼자 운영하는 작은 파이집이다 보니 물리적, 시간적 제약이 많아 의도치 않게 손님들께 "안 돼요"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시외 지역 배달되나요?" -안 돼요.


"모듬타르트 조각 변경되나요?" -안 돼요.


"내일까지 20판 준비해 주세요." -안 돼요.


"휴무일에 가지러 갈게요." -안 돼요.


"현금가 할인해 주세요." -안 돼요.


손님들의 요구는 의적인 것보다는 순수히 필요에 의한 경우가 많다.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급하게 주문을 해야 하는 경우이거나 등등...


그걸 알면서도 거절해야 하는 주인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요구를 다 받아주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저런 요구들에 휩쓸려 다녔다. 안된다고 거절하는 일은 나를 찾아주는 손님들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땐 아직 어렸던 우리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손님들 요구까지 맞추느라 애를 많이 썼다. 가격 할인이나 서비스 요구에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해서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막상 다 맞춰줘도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속상했다. 한번 큰맘 먹고 오케이 한 건 다음번 주문부터는 당연한 일이 되기도 했다.


동네 부녀회에서 처음 호두파이 30판을 주문받았을 때 2판을 서비스로 주기로 했다. 1년 뒤쯤 다시 주문받을 때는 당연히 2판을 끼워주는 걸로 요구받았다. 주문 수량도 그때보다 줄었고 그 사이에 재료값도 많이 올라 서비스는 무리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야박하다는 평가만 받았을 뿐이다.


이런저런 경우들을 겪으면서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점점 가볍게 거절하는 스킬이 늘었다. 손님들 마음이 상할까 염려되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걸 내려놓고, 기준대로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손님들의 니즈는 다양했고,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하면 기준을 벗어나는 요구를 수용하게 되기도 했다. 그럴 땐 그걸 연습 삼아 다음엔 더 잘 대 됐다.


거절하고 나면 '다시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그 미안함을 내보이는 경우보다 당당하게 대처하는 경우가 더 트러블이 없었다. 그리고 단골들은 그 기준에 맞춰서 오히려 나를 배려해 주신다.


코로나 시절, 남편 상황이 나빠져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퇴사했다고 해서 그가 백수로 지낸 것도 아닌데 정기적인 수입이 끊긴 것만으로도 내 마음 한켠엔 불안이 피어올랐다. 파이집에서 더 큰 수입을 만들어서 빵구난 가정경제를 메꿔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동안 세워둔 파이집기준을 무너뜨렸다. 모든 주문을 모두 오케이 했다.


남편은 본인 시간이 자유로워지자 아이들 케어도 해주고, 집안일도 해주고, 파이집 배달도 도와줬다. 그 사이 나는 파이집을 공장처럼 마구 돌렸다. 아니 나를 마구 돌렸다. 받아놓은 주문을 맞추기 위해 밤 12시, 1시까지 일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철저히 지켜오던 휴일도 반납했다. 모든 에너지를 파이집에서 썼다.


그런 생활이 1년쯤 지나자 몸과 마음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는 실수도 잦았다.


전화벨 소리에 예민해졌다. 전화 오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카톡이나 메시지 알림 소리에도 짜증이 났다. 파이집 밖에서는 모든 폰 소리를 죽였다.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점점 주문이 들어오는 게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웠다. 손님들의 사소한 요구에도 화가 났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번아웃이 온 듯했다.


파이집을 며칠 쉬고 가족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봤다. 잠시 파이집을 벗어나면 번아웃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 후에도 이런 예민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신경정신과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여행 후 상태가 조금은 좋아졌다. 온전한 회복이 아닌 임시방편이었지만 생계 이어야 하니 이후에는 힘들어도 그냥 버텼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도 끝나고 남편도 재취업을 했다. 그동안 남편이 비정기적인 수입을 가져다줬지만 내심 불안했었나 보다. 지난 십수 년간 월급쟁이의 아내로 살아온 관성 때문인지 따박따박이 돌아오자 맘이 다시 편해졌다.


더 이상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집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다시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파이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그래도 갑자기 하던 양을 줄이못해 여전히 코로나 전보단 일을 많이 하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해졌다.


리고 다시 손님들에게 "안 돼요."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됐다. 이젠 그 말의 필요성을 안다. 더 이상 '안 돼요'라는 말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 말이 파이집을 오래 유지시켜 줄 비법이었다.

나를 소진시켜 가면서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는 걸 배웠다.


'안 돼요 파이집'은 오늘도 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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