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와 마음이 항상 같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은,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 때 발생한다. 이 날도 그런 날이었다.
전쟁 같다는 수식어 외에는 도무지 어울릴 것이 없는 개학일. 점심시간이 되었고, 하루를 버텼다는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식실로 향했다. 복도 맞은편에서 학년 부장님이 해맑은 표정으로 내 발걸음을 멈췄고, 이십여 명의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복도에 섰다.
“자기야, 나 수행평가 좀 대신해줘. 영 눈이 시리네.”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부탁이라는 말을 꺼낼 때 꼭 나오는 특유의 주파수. 여름방학 중 쌍꺼풀 수술과 지방 재배치를 했다며 선글라스를 끼고 오셨던 부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된 상황에 나는 이미 단련된 상태였고, 덕분에 빠르게 결정 내렸다.
“죄송합니다. 보셨다시피 오전에 전학생이 왔고, 아직 제가 맡은 과목의 수행평가도 덜해서 지금은 곤란합니다.”
일순간 두 명이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거절을 당한 부장님. 그리고 직접적으로 불편하단 내색을 한 나. 심장이 여러 의미로 쿵쾅거렸다. 처음엔 무사히 거절한 나를 자축했고, 곧바로 이어진 계단에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감도 한참 남은 수행평가를, 개학날 오후에, 본인 반에 갈 수도 있었던 전학생이 우리 반에 왔다는 상황을 이미 다 알면서 일을 넘기다니. 나는 개인에게 선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개개인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안전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 부장님은 사뿐히 그 선을 넘었다. 심폐소생술 연수가 끝난 뒤 옆 반 선생님 교실에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부장님이 들어오시자 자연스럽게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런데 학기 초부터 불편한 일을 만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냐 싶었고, 어제의 사정도 모르는 선생님 두 분이 계시니 굳이 불편한 얘기를 꺼내진 않으시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부장님은 들어오자마자 “교무실에서 잘못한 거랑 내가 수행평가 부탁한 게 무슨 관련이 있어. 그럼 내가 이 OO 선생님한테 미안해야 해?”라며 소리치셨다.
그리고 나는 깨진 유리가 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한 유리가 깨지면 그 옆의 유리는 더 쉽게 깨지는 법이니까. 어른 말씀에 기꺼이 따르는 신규,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사람. 그간 노력했던 시간들이 한 번에 무너졌다. 그러니 더는 두려워할 게 없었다.
높은 목소리로 다그치는 부장님께 대답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도 미안하실 순 있다고. 누군가는 이득을 봤고, 누군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런 상황을 알면서 본인의 일을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게다가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있는 건데, 거절을 했을 때 여러 사람 앞에서 몰아세우는 건 지시와 다를 바 없다고.
부장님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이 시려서인지, 처음보인 내 모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본인은 이제 에어컨 아래 앉아만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씀만 하셨다. 그리고 그 눈물은 내게 또 다른 트리거가 되었다.
“부장님, 부장님은 자의로 수술하셨지만 저는 부장님 일 도와드리다 운 적 많아요. 제가 신혼여행 다녀와서 복귀한 첫날. 아이들이 기간제 선생님 말씀을 1교시부터 6교시 동안 녹음한 일, 서로 싸우다 117에 신고한 일, 학교 밖으로 도망친 학생이 있었던 것 등. 다 교감 선생님과 학년 선생님들께서 말씀해 주셔서 알았어요. 그런데 그날 오후에 부장님 오후에 조퇴 달고 나가시면서, 학부모 연수 일정 안내를 잘못했으니 키즈콜 새로 보내라 하셨죠. 키즈콜은 원래 실무사님께서 맡아주신 일 아닌가요. 저는 보내본 적도, 어떤 내용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어요. 그 상황에서 30명 전화번호 11자리를 울면서 쳤습니다. 그 날 오후에는 학부모 상담도, 청소년 단체 환불도, 제 할 일도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게 항상 웃으며 거절하는 법을 배우라 하셨다. 지나친 요구를 다 듣고 참아주다 결국 사소하고, 때론 이상한 곳에서 터지는 내가 안타까우셨던 것 같다. 기질적으로 거절과 무표정이 어려운 내게 ‘웃으며’ 거절하는 처세술을 익히라고 하셨다. 나는 이번에도 할 건 다 해주고 결국 위신만 잃는 바보 같은 짓을 한 걸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답은 ‘NO’였다. 울어가며 부장님의 백업을 했던 그날도 내 나름대로의 머리를 썼다. 최선을 다해서 선을 그었다. 단체 문자를 보내본 적도 없으며, 어떤 내용을 보내야 하는지도 몰라 부장님을 대신해 문자 보내긴 어렵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직접 하실 수 있게끔 키즈콜 어플 접속 링크도 보내드렸다.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매번 자동로그인을 해서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모르니, 지금 본인 교실에 있는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 되돌아왔을 뿐.
그렇다면 내가 소위 말하는 mz 행세를 했을까. 부장님과는 지난 2년 동안 같은 학년을 맡고 있다. 바로 옆 반임에도 굳이 오후 회의는 우리 반에서 하자고 통보하는 부장님께 그 까닭을 여쭤본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내 컴퓨터로 파일을 열어 회의한 뒤 내가 수정하는 것도, 음료를 마신 뒤 일회용품을 치워야 하는 것도 사사로운 일이라며 열 올리지 않았다. 마음에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학년 초, 다른 학년의 선생님들을 초대해 대접한 식사 자리의 설거지를 홀로 담당한 것도 몇 년 전까지 선배들은 으레 하던 일이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1학년 말쯤 학급이 너무 힘들다는 내 말끝에, 2학기 말에나 있을 교육과정 발표회 학년 예산을 어떻게 쓸지 도맡아 계획해 보라던 부장님. 1학년 신입생 환영회 선물을 대신 품의 올려달라는 말씀에도 꽤나 상냥하게 선을 그었다고 자부한다.
세상에서 가장 날 사랑하는 엄마의 조언대로. 지난 2년 간 나는 꽤나 상냥하게, 웃으며 내가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