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일로 구독하는 레터가 하나 있다. 금요일이면 전송되는 그 레터에는 요즘 유행하는 전시회, 카페, 놀거리 등이 소개된다. 이번 주에는 일력이라는 것을 소개받았다. 세 가지 일력이 있었는데, 첫번째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의 절기가 적혀 있고, 매일 매일 절기에 맞게 임무를 부여해준다고 했다. 탁상 달력이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루치의 미션이 떨어진다. 추억을 남기는 걸 좋아하기에 임무를 받고 기록하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구매한 일력은 하루만에 배송되었다. 어제 펼쳐보니 절기가 소설이었다. 눈이 조금 오는 날이었다. 그렇다기에는 따뜻한 날이었지만 인터넷에 검색해 본 절기와 동일했다. 매년 다시 쓸 수 있는 만년 일력이었는데, 나는 이것으로 우리나라 절기가 양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의 임무가 궁금해서 빨리 넘겨 보았다. 나무에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 빨간 열매를 찾으라고 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남천, 주목, 마가목 등의 빨간 열매가 열린다고 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주목 정도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자연이 많이 멀어지고, 일부 조형적으로 자연 끄트머리를 데려와 놓은 도시에 살면서 빨간 열매를 찾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25년도의 빨간 열매가 무엇일지, 추상적으로 찾아내겠다는 다짐을 적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변호사 친구와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대학교 때 친구인데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취욕도 강한 친구였다. 잠실나루에서 내려 예약해둔 초밥집으로 향해 가는데 내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게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가냘프게 팔을 뻗고 있는 산수유 나무였다. 산수유 열매마저 달려 있었다. 망설이면서 저 열매에 손을 뻗어도 될까, 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이 근처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당당하지 못한 애매한 마음으로 가까운 산수유 열매에 손을 뻗었는데, 열매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아주 소중하게 그 열매를 따서 손으로 닦아내고 호호 불었다. 농약이 묻어 있겠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달력에 적혀 있던 임무를 실제로 완수하였다는 기쁨, 그건 우연이 닿고 닿아 좋아하는 붉은 열매 산수유를 발견한 놀라움이었다.
어릴 적에 산 근처에 산수유 열매가 있었다. 산 언저리에 있는 식당에서 기르는 산수유였다. 그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는지 확신은 없다. 사람이 별로 오지 않는 가게였다. 내 눈길은 그 식당 앞 산수유에 항상 머물렀는데 어린 나이에는 키가 높아서 손이 잘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나뭇가지는 아주 못 닿을 거리도 아니어서 꼭 점프를 하면서 손을 뻗게 만들었다. 그러고 전리품처럼 열매 몇 알을 따서 먹으면 아주 도톰한 열매알이 입 안에 들어왔다. 보들보들한 열매, 누르면 물렁물렁하게 살이 움직이는 잘 익은 열매는 입 속에 넣으면 과즙을 터뜨리면서 달콤함을 남겼다. 아주 작지만 풍성한 식감의 열매, 산수유 이것을 이렇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산수유를 입에 넣었다. 그 어릴 적에 잘 익은 녀석보다 훨씬 딱딱하고 새큼한 맛이 퍼져나왔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면서 동시에 입이 즐거움으로 벌어졌다. 어린 산수유였다. 도발적으로 상큼해서 생명력이 그대로 느껴지는 덜 익은 산수유, 신 맛에서 나는 환희를 느꼈다. 물렁하지 않고 단단한 열매, 산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서 향이 덜할 줄 알았는데 내 기억 저편에서 아무리 끌어다 가져와봤자 이 순간 터지는 새콤한 맛에 견줄 수 없었다. 신맛이 아찔하지만 동시에 피로 가득 퍼지는 생명, 살아 있다는 맛 그리고 확 일어나는 강렬한 어린 시절까지 터뜨려졌다.
산수유를 먹고 나니, 이게 무슨 일일까 어리둥절했다. 우연이 닿아서 빨간 열매를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오늘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매일은 우연이 닿아서 특별한 하루가 되고, 나는 요즘에는 매일을 사는 게 즐겁다. 산수유도 그런 마음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장치였다. 다음 날이 기대되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 내가 보낼 하루가 어떤 시간으로 채워질지 풍성하게 느끼고 담아내고 싶다. 살아있다는 기적을 매일 실현하며 내가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고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나는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산수유의 우연처럼 매일 선물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