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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Feb 11. 2024

배려(配慮)석

배려(配慮)석     


금요일 퇴근 지하철을 북새통이다. 그나마 조용한 건 요즘이 코로나시대라 말을 하지 않아 침묵이 흐를 뿐. 가산디지털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사람들로 넘쳐났다. 앉을 자리는 바라지도 않지만 한쪽에 조용히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나마 견딜만한 것은 오늘이 주말이라는 것이다. 좀 힘들게 퇴근을 해도 이틀을 쉬니까 견딜 수 있다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들 주고 서 있었다.    

 

두 정거장을 지나자 앞에 앉은 아가씨가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은 땡잡은 날이구나, 이렇게 빨리 자리가 생기다니.”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살금살금 아가씨 앞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역에서 앉아 있던 아가씨가 내리고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까지도 임산부를 위해 배려한 분홍좌석은 비어 있었다. 더러 노인들이 앉기도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 노인들도 잘 앉지 않는 자리가 되었지만.     


분홍 좌석이 비워진 상태로 두 정거장을 지나고 세 정거장에서 건강한 청년이 오더니 빈 분홍좌석에 털썩 앉는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뭐라는 이가 없다. 거기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사람들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다. 가만 있자니 은근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분홍 좌석에 앉은 청년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은 다른 승객들에게도 화가 났다. 이럴 수는 없다.   

  

“저기요, 여기는 분홍 좌석입니다. 임산부들이 앉는 자리거든요.” 이 청년 내 말에 미안한 기색도 없이 앉은 채로 당당하게 말한다. “알아요.” 기가 막힐 노릇이다. ‘죄송합니다’나 ‘미안합니다’를 기대한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안다면 일어나 비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말에 이제는 눈에 힘까지 주고 나를 본다. “뭘 잘못 알고 계신 듯한데요. 분홍 의자는 비워두는 자리가 아니라 양보하는 자리라고요. 앉았다가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 양보해 주는 자리라고요.” 어라. 이 청년 만만하게 볼 청년이 아니구먼. 나와 청년이 이러는 사이 주면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눈알을 굴리고 있다.      


“저기요, 누가 나 임신했으니 내 자리 비워주세요 할 수 있을까요? 생각을 좀 해보세요.” 이 말에 이 청년 이제는 목에 힘까지 주고 나를 가르치려 든다. “모르시나본데요. 초기 임산부들을 위해 뱃지를 주거든요. 임산부가 말하지 않아도 그 뱃지를 보고 양보하면 된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른 임산부는 눈으로 보면 누구나 알 것이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기가 막힌다. 콧구멍이 두 개이니 망정이지 하나였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심정이다. 이 청년을 어떻게 이해 시켜야 하나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스크라도 없어야 말이라도 시원하게 할 텐데, 그럴 상황도 안 되고. 병에 걸릴까봐 마스크까지 쓰고 입을 닫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싫고.    

 

 

“맞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배려석이지요. 배려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앉았다가 비워줄 배려는 있어도 처음부터 비워둘 배려는 없다는 뜻인가요?” “너무 비약하시는 경향이 있으시군요. 그냥 비워두고 가는 것 보다는 앉았다가 비워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역시 요즘 젊은이답다. 

     

나도 이제 더 이상 뭐라고 하기가 거북스럽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람들이 시선이다. “늙은이가 국으로 가만있지 뭐 잘 났다고 훈계야” 라는 소리가 귀에서 왕왕거린다. “한 가지만 더 알려 드릴게요. 임산부를 앉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태아의 무게 때문에 서 있는 것이 힘들고 서 있는 임산부를 누군가가 실수로 밀치거나 전동차가 급정거 했을 때, 넘어질 가능성이 높아 아기를 위험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앉은 이 자리가 선생님의 아내나 아이가 앉을 자리는 아닌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러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젊은이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분홍 의자에 앉아 휴대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다. 저런 사람이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 비켜줄까 걱정 아닌 걱정도 되고 한 젊은이 때문에 엄마와 아이가 힘들까도 걱정이다. 세상사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나 때문에 불편한 사람은 없었을지 그것도 걱정이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때 까지도 청년은 분홍 의자에 앉아 휴대폰과 하나 되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사진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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