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매트리스에서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다. 일하러 가기 싫다.. 내가 뭐 땜에 대체 뭘 위해서.?
음성지원이 된다면 기분 탓입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생계적인 목표가 가장 최우선적이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수많은 직업들 중 자신이 하는 일을 고르고 종사하는 데에는 좀 더 많은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믿는다. 혹자는 그저 별 목적 없이 관성적으로 일을 하고 새로운 곳에 도전하기 어렵다는 말로 자신의 현 주소지를 둘러댄다. 하지만 나는 그것 역시 지금껏 쌓아놓은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와 업무적 숙련도를 허비하기 싫으며, 지금의 직장에서 본인의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는 기회비용적 관점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직장에서 어떤 자아실현을 꿈꾸는가. 최소한 경험적으로 돌이켜봤을 때는 두 가지, 1) 내가 조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기여할 수 있는가 2) 내가 그 일을 하며 충분한 보상을 받는가 로 귀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는 차치하고서라도 팀에 충분한 효용을 내가 낼 수 있고 그걸 통해서 나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된다면 썩 괜찮은 직장이지 않을까?
주 52시간 근무도 가능
#2. 지금의 회사
23년 12월 현재 나는 모 회사의 상품기획 직무에서 근무 중이다. 그런데 자사 제품과 타겟 고객층을 이해하고, 상품을 기획하는 고전적인 '상품기획' 업무와는 달리 현재 우리 팀의 일은 고객대응에 다소 치우친 편이다(사실 기술영업 내지는 고객지원 업무에 더 가깝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고객사가 한 프로젝트에 대해 제시하는 Action Item들을 자사 엔지니어에 전달하고, 그 진행상황을 매주 업데이트하여 영어로 소통하는 일이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아이템 갯수도 많고 소통이 필요한 부분도 많으며, 그걸 PPT로 표현하는 것까지 다 따로 있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많이 드는 편이다. 실제로 한 달에 초과 근무가 15~20시간은 고정적으로 찍히는 편이기도 하고.
포괄임금제만 아니었어도 달에 30은 더 벌었다
사실 이런 고객 대응 업무에 대해 근래까지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껏 과학공학만 공부해왔고 비즈니스적 지식은 전무했으니까. 입사 9개월 밖에 안되었지만 오히려 대부분이 문과인 팀 안에서 엔지니어분들이 설명하는 내용에 대해서 훨씬 더 빠르게 이해하고 다른 팀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맹점을 짚어내는 경험도 몇 번 있었다. '내가 어디서 쓸모 있게 쓰일 수 있다'라는 감정이 9개월 차 사원이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양의 일을 몇 번이고 처리하며 워라밸이 나빠지면서도 다시 일에 몰두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에 대해서 의심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아니, 현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시작은 S사에 다니는 오랜 친구와의 대화. "인센티브가 12.5% 정도다 야발" 등등 인센티브와 회사 상황에 대한 푸념 아닌 푸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회사는 고과가 훨씬 더 좋을 때 받는 수치가 다른 회사에서는 한참 떨어진 수치라니.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뭐 그에 대한 보상도 나름 응당히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시야가 너무 좁았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히히 과자 맛있다
물론 지금 회사에 들어오면서 박봉이라는 얘기, 회사 사정이 매우 안 좋은 얘기 등등 기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나 꽤나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최소한 비슷한 대우는 받아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치인 것 같다. 뭐 연봉뿐만 아니라 복지포인트, 제휴 혜택, 사내 식당 등등 여러 부분에서 밑지고 들어가는 게 많지만 그거 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까 적당히 단념하려고는 한다.
그리고 사실 제일 트리거가 됐던 건 고객 미팅에서의 내 역할이 애매해진 게 크다. 최근 업무분장을 하며 내가 한 프로젝트의 메인 담당자로, 원래 같이 일하던 A 선배님은 같이 참여만 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A 선배님은 지금 프로젝트에서 1년 정도 먼저 해왔던 분인데, 오랜 외국 유학 경험으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신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주로 소통하던 고객도, 내부의 엔지니어도 어떤 일에 대해 소통할 일이 생기면 A 선배를 찾는다. 엔지니어 분들은 같이 일하며 얼굴도장을 찍었던 A 선배가 익숙하기 때문에, 고객분들은 당연히 기존에 연락해 오던 루틴이 있고 프로젝트의 히스토리를 잘 알던 A 선배가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메인 담당자라는 소명을 가지고 일을 하려던 내가 패싱 당하는 기분이 자꾸만 든다. 익숙한 창구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을 이해하고, 실제로 내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왜인지 모를 아쉬움만이 남는다. 소통의 접점이 두 곳으로 나뉘며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생기면서 과연 내가 내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발생한다.
안녕하세요 입사 9개월 차 돌팔이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내 스스로가 A 선배와 나를 비교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특히나 갑작스러운 어젠더가 나오면 고객 미팅 현장에서 우리는 엔지니어의 말을 고객에게, 고객의 말을 내부 엔지니어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곧 인간 파파고가 되는 셈인데...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말해야지 싶다가도 당장 말을 할 때는 버벅거리고, 번역이 제대로 안 되는 게 너무 어렵다. 그 와중에 옆에서는 완벽히 전달하고, 오히려 엔지니어 분들이 고객을 자극할 수 있는 말을 하더라도 순화해서, 부드럽게 표현하는 예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과정에서 내 부족함을 뼈저리게 체감한다. 가끔 A 선배가 기술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고 내심 이런 부분에서는 내가 경쟁력이 있구나 하면서 도취했다가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 얼어붙는 내 입을 원망하게 된다.
멀리서 본다면 같이 일을 하는 입장에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이상적인 그림 같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금 감정은 무엇일까. 질투일까 단순한 부러움일까 인정욕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해 오는 아쉬움일까... 추후에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다시 글을 써보려 한다.
#4.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거냐?
당장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최근 있었던 일련의 일화들이 내가 직장에서 꿈꾸던 자아실현과 대립되는 정도만 깨달았을 뿐이다. 정말 아직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해결되는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초년생의 혈기로 하는 치기 어린 생각들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직장에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지내보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지금 일이 재밌기도 하니까. 영어도 열심히 공부해 보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잡념들은 없어지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아 그냥 회사에서 돈만 좀 많이 주면 좋겠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