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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이 Mar 15. 2024

컷-, 오케이!

중학생 단편영화 제작기


    십여 년 전 어느 날, 하복을 입은 스무 명 남짓한 중학생들이 방과 후에 3학년 7반으로 모였다. 우리들은 '직업 체험 및 또래 친구들과의 활동으로 협동심 증진'과 같은 이유로 만들어진 <영화 제작 동아리 - 여름캠프> 동아리 회원이다. 이 동아리는 교외에서 감독 선생님을 모셔와 3달 동안 방과 후 교육을 하고, 여름 방학 때 단편 영화를 제작하여 청소년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는 일회성 동아리였다. 동아리에 온 친구들은 다양했다. 장래희망이 배우거나 생활 기록부를 채우려는 친구들도 있었고, 새로 생긴 동아리에 호기심이 생겨 온 친구 등 어찌 됐던 영화의 이응(ㅇ)도 모르던 친구들이었다.


십여 분을 자리에 앉아 기다렸을까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서 감독 선생님을 모셔왔다. 감독 선생님의 자기소개와 살가운 인사에 쑥스럽고, 어색한 만큼 중학생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었다. 그조차 귀엽게 봐주시던 감독 선생님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감정 표현 방법을 영화에 빗대어 가르쳐 주셨다.

기쁨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조명 효과로, 슬픔은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것 같은 오디오의 진동으로, 신뢰는 대담한 카메라 무빙으로 말이다. 그 가르침은 스무 명의 친구들을 영화 제작에 깊게 빠트리기 충분했다.


    약 3개월간의 기본 교육을 마친 후 친구들은 흥미에 맞추어 연출부, 제작부, 촬영부, 미술팀, 편집팀으로 나누고, 역할을 분담했다. 동아리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학년이 섞여있었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일념 하에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나리오를 짰다. 시나리오는 <가제-우정>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생긴 오해와 갈등을 풀고, 더욱 돈독해지는 우정 이야기‘로 좀 뻔했지만, 제작자가 중학생인 만큼 중학생에게 가장 중요했던 친구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정했다.


여태 조별 숙제 정도만 해봤던 중학생들은 팀에 소속되고, 역할이 있는 회의(라고 쓰고 잡담이라 읽는 것)를 하는 모습에 제법 심취해있었다. 촬영 준비를 위해 팀별 회의, 전체 회의, 팀장 회의 등 수많은 회의를 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등 개인 전자기기를 소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언택트 회의를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카카오톡도 겨우 있던 때다 보니 꼭 다 같이 만나서 회의를 했었다. 고작 일주일 촬영하는 데에도 결정사항이 얼마나 많은지 동아리 시간에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는 턱없이 모자라 학교 밖에서도 종종 만났다.


캔모아 정도 가봤던 중학생들은 어른들이 갈법한 띠-아모 카페에 가서 아이스 초코, 딸기 주스, 병 오렌지 주스 등을 시켜 자리에 앉았다. 문방구에서 200원 주고 뽑은 촬영 계획표와 시나리오를 테이블에 펼쳐놓고, 색색깔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전자사전으로 맞춤법도 검사하면서 회의했다. 저녁까지 계속된 회의로 부모님께 전화가 왔었는데, '엄마, 나 회의 중이야. 늦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던 순간은 꽤 짜릿했다.


    매미가 찌르르 울어대던 여름날, 긴 준비를 마치고 <가제-우정>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색색깔 형광펜으로 떡칠된 시나리오와 촬영 계획표를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 슬레이트 걸 :(명랑한 목소리로)2의 4의 3.

    - 탁 (슬레이드를 세게 친다.)

    - 감독 : 레디-, 액션!


모든 촬영은 ‘슬레이트 소리’와 감독의 ‘오케이'로 끝이 나는데, 여기서 슬레이트 걸이 외친 <2의 4의 3>은 < 2번째 장면- seen / 4번째 카메라 방향 - cut / 3번째 촬영 - take>을 뜻한다. 그중 <take>는 쉽게 말하면 ‘재촬영 횟수’인데, 감독이 ‘컷-’을 외친 후 ‘오케이’를 이어 외치면 다음 카메라 방향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촬영을 하는 것이다.


    - 감독 : 컷! 다시 갈게요.


재촬영을 하면 촬영은 딜레이 되지만 괜찮다. 엉망으로 연기해도, 붐 마이크가 카메라에 잡혀도, 웃음이 터져 나와도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쿨하게 ‘없는 일인 셈’칠 수 있으니까.

‘컷-’ 외침과 동시에 붐 마이크 걸은 잠시 나마 무거웠던 붐 마이크를 내려두고, 연출부는 감독과 함께 촬영본을 재생시켜 본다. 미술팀은 배우진에게 달려가 머리를 정돈해 주거나 어질러진 소품을 재위치 시켰다. 카메라 on과 함께 가장 바빴던 배우진은 한숨 돌리며 대사를 검토하고, 카메라 off와 동시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팀원들의 고생을 찍어주는 메이킹 감독까지. 컷-소리와 슬레이트 사이에는 수많은 팀의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고작 일주일 촬영을 하면서 우리는 매일 회식을 해댔는데, 포도 주스와 콜라를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 분명 알코올은 1%도 없을 텐데 포(도)(라)을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분위기인지 자체 제작 폭탄주인지 모를 것에 취해 헤롱거렸다. 그런 우리를 보며 감독 선생님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회식을 자주 한다.’며 웃기도 하셨다.


    - 감독 : 오케이, 촬영 끝!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약간은 쉬어버린 감독의 명랑한 목소리를 끝으로 영화 촬영이 끝났다. 우리는 다 같이 박수를 쳐대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서로 어깨를 쓸어주며 더운 날의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에 환호했다. 촬영본은 ‘촬영 끝!’이라는 소리에 함께 웃지 못한 편집팀의 편집 기간을 거쳐 화질 720p 18분짜리 단편 영화로 완성되었다.

완성된 영화는 공모전에 출품했고, 교내 영화제를 열어 전교생에게 공개됐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났지만,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은 엔딩 크레딧에 작게 올라오는 본인 이름을 보기 위해 꽤 오래 자리해있었다. 그렇게 개봉과 동시에 막을 내린 영화 <가제-우정>과 중학생의 순수하고 어설픈 열정이 가득했던 <영화 제작 동아리-여름캠프>는 해산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완벽하게 편집된 장면들만을 원한다. 이 시점에서 적당히 견딜만한 시련을 겪고, 이 장면에서 귀인이 등장하고, 이 컷에서 원하던 대사가 들리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수없이 반복된 ‘컷’과 ‘슬레이트’ 사이에 있는 분주한 장면의 연속이다. 어디 보여주기엔 어설프고, 찌질하기도 하며, 우습기도한 그런 시간들 말이다.

지금에서야 <영화 제작 동아리-여름캠프> 기억을 되짚어 보면 결말이나 공모전 출품 결과 같은 건 기억도 안 난다. 기억에 남은건 시간이 지나 완성된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조금 창피했었다.’는 것과 편집되어 사라져버린 웃음 터진 친구들의 얼굴뿐.


만약 내 인생을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 수 있다면 1시간 30분 정도는 그 분주한 장면을 담고 싶다. 어차피 영화 내용 보다 '오케이'를 듣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던 친구들이 더 기억날 테니까. 십여년 전 어느날, 1분만에 올라가버리는 엔딩크레딧을 보기 위해 자리해있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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