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세포의 관계
인간은 흔히 자신의 몸을 자아의 물질적 기반으로 인식합니다. 신경과학, 생리학,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동일한 DNA, 즉 같은 유전정보를 공유하지만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세포는 신경세포로서 신호를 전달하고, 어떤 세포는 근육세포로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또 어떤 세포는 혈액 속을 순환하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이러한 세포들의 정교한 협력과 상호작용이 유지하는 질서 속에서 ‘나’라는 의식적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발생합니다. 나는 이 37조 개의 세포 중 어느 하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아니면 그 모든 세포들의 집합 자체가 곧 나인가? 더 나아가, 만약 내 세포 중 하나를 선택해 그것을 동일하게 복제한다면 그 복제체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독립된 존재일 뿐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 생물학을 넘어 존재론, 인식론, 신학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존재론에서는 오랫동안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논의되어 왔습니다. 하나의 존재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합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합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가? 인간 또한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나는 단순히 세포들의 집합일까, 아니면 세포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창발적 존재’ 일까?
각각의 세포는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떤 단일 세포도 나의 기억, 의식, 감정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세포만으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37조 개의 세포들이 조직화되어 만들어낸 뇌와 신경계, 호르몬 시스템, 면역계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나라는 의식적·정서적·행동적 주체가 형성됩니다. 즉, 나는 단일 세포가 아니라 세포들이 형성한 복잡한 패턴이며, 그 패턴에서 창발 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로부터 인간은 물리적 구성 요소에 의해 제약받으면서도, 그 구성 요소들의 단순한 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차원적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나는 세포들의 단순한 합 이상이며, 그 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 즉 하나의 전체로서 정의됩니다.
만약 내 몸의 세포 하나를 떼어내어 완벽하게 복제한다면 그 복제체는 나인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일란성쌍둥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DNA가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자아를 가진 독립된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 의식은 유전자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 경험, 환경 자극,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신경 연결망 등 비유전적 요인이 의식과 정체성을 만듭니다.
따라서 한 세포로부터 새로운 나를 복제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유전적으로 동일한 존재이지, 나 자신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세포 하나는 나를 형성할 수 있는 ‘설계도’ 일뿐, 지금의 나를 대체하거나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나는 단순한 유전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 속에서 형성된 유일무이한 의식적 패턴입니다.
세포들은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DNA를 기반으로 단백질을 만들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기능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몸 전체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세포에게 의식이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세포는 자신이 속한 거대한 유기체, 즉 ‘나’를 어떻게 인식할까? 세포에게 나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 질 것입니다.
내가 음식을 먹으면 세포는 영양분을 얻습니다. 내가 운동을 하면 근육세포는 강해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 일부 세포는 손상됩니다. 내가 약물을 복용하거나 수술을 결정하면 특정 세포의 생존 여부가 달라집니다.
세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 그들의 환경이 바뀌고 운명이 결정됩니다. 이 점에서 나는 세포에게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계가 거꾸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내 몸속 세포들에게 나는 신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더 큰 질서 속에서 나는 그저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나는 인류라는 사회적 유기체의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입니다. 지구 역시 광대한 우주 속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즉, 존재는 계층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각 계층에서 상위 존재는 하위 존재에게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위 존재 역시 더 큰 차원에서는 하위 존재가 됩니다. 신의 개념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단일 세포로 정의될 수 없으며, 37조 개의 세포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독특한 패턴입니다. 나는 단순한 물질의 합이 아니라, 그 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차원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은 유전적으로 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시간, 경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됩니다.
세포들은 의식이 없어 나를 신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존 조건을 제공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나는 세포들에게 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더 큰 질서 속에서 하나의 작은 세포일 뿐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더 큰 세계 속에서는 작은 구성 요소에 불과합니다. 이 계층적 존재의 연속성을 이해할 때, 인간 존재의 본질과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유전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만약 나의 현재까지의 기억을 다른 뇌에 이식해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바타’를 만든다면, 그 아바타는 과연 나와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존재인가?
인간의 기억은 뇌 속 신경세포들이 형성하는 시냅스 연결망의 패턴 속에 저장됩니다. 새로운 경험이 생기면 신경회로가 재배치되고, 시냅스 강도가 변하며, 특정한 연결 패턴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학습한 지식, 몸이 기억하는 기술들을 보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 기억이 DNA에 직접 기록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일은 없습니다. DNA는 단백질 합성과 세포 기능의 기본 설계도를 제공하지만, 개인의 경험과 기억은 그 설계도의 일부가 아니라 개별 신경망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특정한 경험(예: 강한 스트레스나 공포 반응)이 후성유전(epigenetic)적 변화로 이어져, 그 변화가 자손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습니다. 특정 냄새에 대한 공포를 학습한 쥐의 자손이 같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례가 그 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경향이 전달된 것이지, 부모의 개인적 기억이 영화처럼 재생되는 형태의 유전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기억 자체가 유전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제 다른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나의 현재까지의 모든 기억, 성격, 습관을 포함하는 ‘나의 정보’를 추출해 다른 뇌(혹은 인공 뇌)에 이식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존재는 나의 아바타입니다. 그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내가 사랑한 사람을 기억하며, 내가 좋아했던 음악과 내가 품었던 철학적 고민까지 공유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나인가?
철학적으로 이 문제는 정체성(identity)의 본질로 귀결됩니다.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은 그의 저서 Reasons and Persons(1984)에서 개인의 동일성은 물리적 신체의 지속성보다는 심리적 연속성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바타는 분명 나의 심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은 나와 동일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바타가 생성되는 순간 두 개의 ‘나’가 된다는 점입니다. 원래의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아바타는 복제된 의식을 가진 또 다른 존재로 분리됩니다. 그 순간 아바타는 ‘나’의 과거를 공유하지만, 그 이후의 경험과 선택은 원래의 나와 다르게 전개됩니다. 결국 그는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또 다른 사람’ 일뿐,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광대한 우주에서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가진 두 개의 다른 고유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원자나 분자 등 동일한 양자계에서 두 개 이상의 동일한 페르미온(예: 전자, 양성자, 중성자)은 동시에 동일한 양자 상태를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어떤 존재도 동일한 상태를 공유할 수 없습니다. 즉,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고유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만약 반대로, 원래의 내가 소멸하고 아바타만 남는다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의견이 갈립니다. 아바타가 나의 의식과 성격, 기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 존재가 진정 ‘나’인지 아니면 단지 나를 닮은 새로운 의식인지에 대해 합의된 답은 없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의식의 연속성—즉 깨어있는 내가 곧이어 깨어있는 동일한 나라는 주관적 경험—이 끊어지면 동일성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기억과 성격은 복제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주체적 경험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반응 경향이 후성유전을 통해 일부 전달될 수는 있지만, 개별적 경험 자체가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나의 기억과 성격을 다른 뇌에 이식해 아바타를 만든다고 해도, 그 아바타는 나와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또 다른 존재일 뿐입니다. 그는 나의 과거를 살았지만, 그의 현재와 미래는 그의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나 기억의 총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연속적인 의식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기억을 복제한 아바타는 나와 같은 과거를 가진 형제와 같지만, 동일한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37조 개의 세포들이 살아 숨 쉬는 이 몸 안에서,
나는 내 몸이라는 작은 우주의 신이자,
또 다른 더 큰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 경이로운 관계 속에서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