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공감과 배려
▲ 그리운 나의 말동무 © Kyrene
나는 운동을 즐겨하지 않는다. 운동신경이 그다지 발달한 것도 아니고 우선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파트너를 힘들고 재미없게 만들 수 있어서 테니스, 탁구처럼 1대 1 상대가 있는 운동은 더욱 하지 않는다.
젊은 날, 파트너 없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을 고려하던 중 내가 좋아하는 동물인 말(馬)과 함께하는 승마(乘馬)를 선택하게 되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초원을 달리는 말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달릴 수는 없겠지만 생명이 있는 말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말동무가 되어줄 것 같았다.
개인교습을 받으며 어느 정도 혼자서 즐기는 정도가 되었다. 말은 무척 예민한 동물이라 제 등에 있는 기수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재빨리 눈치를 채고 반응한다. 기수가 겁을 내는지, 거칠게 대하는지, 여유가 있는지, 또는 저를 얼마나 다정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말은 시야가 매우 넓어 양 눈으로 주변상황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기수의 그림자도 살피고 채찍을 잡고 휘두르는 것까지 감을 잡고 오히려 기수를 조종하기까지 한다. 말이 당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운동하던 말은 각설탕이 최애(最愛) 간식이어서 운동 전에는 꼭 각설탕을 선물하고 목과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인사를 나누며 소통을 먼저 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운동을 하던 중에 일이 벌어졌다. 무슨 소리에 놀랐는지 말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고삐를 포함한 모든 브레이크 시도가 작동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 고삐를 놓친 나는 흥분한 말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의식은 있는데 지금 내가 무슨 상황인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이 멈춘 듯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표현에 적합하게 눈을 뜬 채 멍한 상태가 된 것이다. 조교가 달려와 말을 가두고 나를 사무실 소파로 옮기는 과정을 눈으로 보면서도 남의 일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교가 계속 말을 시키는데 입이 열리지 않고 그냥 쳐다보기만 했던 기억이다.
다행히 신체부위에 부상은 없어서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진정을 한 후, 집 전화번호를 묻는 조교에게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번호를 알려줬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연락처 관리를 하던 때가 아니다. 전화번호의 주인은 직장의 책임 있는 관리자 위치에 있던 대 선배님이었다.
그 선배라면 지금의 상황을 안전하고 현명하게 대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이 그랬다. 그분은 언제나 침착하고 후배들의 이익을 위해 늘 힘써 주던 분이다. 곧바로 달려와 주셨고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집까지 바래다주시고, 병가 처리할 테니 상태를 지켜보라고 당부하셨다. 정신은 차렸지만 대화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선배의 권유대로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출근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치매’라는 입에 담기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너무도 많다. 사고 당시를 떠 올리면,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느낌이 무서웠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일생이 저장되어 있는 두뇌, 신비한 정신세계가 파괴되는 일은 공포스럽다.
그때 후배의 사고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와 준 고마운 선배는 평생의 은인으로 남아있다.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가장 긴박하고 절실한 순간에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선택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선배의 자리를 잘 지켜온 것일까?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겠다. 동물과 사람이 함께하는 스포츠인 내 추억 속의 승마는, 이제 장애우를 포함해 환자 치료 목적으로 재활운동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