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자리를 앉지 마오.
얼마 전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오후. 왠지 지하철을 타야 할 것만 같았지만, 잠깐이라도 광합성을 즐기고자 버스에 올라탔다. 웬일인지 버스가 텅텅 비어 있었다. 악마가 속삭였다. "5분 후면 내릴 건데 뭣하러 뒷좌석까지 가, 그냥 편히 여기 앉아"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버스 앞칸의 나와는 상관없는 임산부 좌석에 앉았다. 그리곤 목적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날이 이렇게 따뜻한데 왜 이렇게 내 엉덩이만 차가운 거지??
엄청나게 수상할 정도로 시려댔다.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남들 눈을 피해서 조심스레 엉덩이를 더듬어 봤다.
............... 이렇게까지 축축하다고?? ;;;
엉덩이 양쪽이 다 그랬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든 생각.
나일까 VS 남일까
근처 스타벅스 화장실로 신속히 들어갔다. 간단한 점검 끝에 다행히도(?) 나는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나니,
그다음에 든 생각
이 물은 근원지는 어디일까. 이 것의 정체는?
킁킁킁. 내 후각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불행 중 다행히도 응가류는 확실히 아니라는 것이었다(중요한 부분). 또한 '침착해, 이건 고작 물이야'라고 믿고 싶었던 내 바람이 내심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여 봐야 오줌류 정도일 것으로 추측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하하하
그다음 나의 생각의 흐름이다.
고의일까 VS 실수일까?
어떤 빌런일까 VS 아프신 어르신일까?
뭐가 되었든 아찔한 경험이었다.
후속 편
집으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예정에 없던 유니클로에 들어가서 대충 세일하는 아무 바지와 속옷을 고르고 빠르게 갈아입었다. 정신을 차리고 볼일(다시 화장실 간 거 아님. 진짜로 외출한 목적을 의미)을 다 마친 후 심신 안정을 위해 도너츠 가게에 들어갔다.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냠냠냠 맛있게 도너츠를 뜯던 중 들린 소리
드드드득
무언가를 먹다가 살을 씹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세게 그것도 송곳니로 스스로를 씹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소리와 식감이 비슷해서 얼마 전 먹은 두꺼운 고기를 씹었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을 빌어서 미안하다고 전한다
이 날의 교훈 (스스로에게 전하는 말)
임산부 자리에는 사람이 없더라도 되도록 앉지 말 것
1주일에 2-3회라도 채식을 실천할 것
채식 실천에 있어서 고기와 생선을 차별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
이 날 운수 좋은 날에 당첨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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