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소외된 것에 대하여
손에 닿는 모든 면이 핑크색인 예쁜 책을 발견하다.
"지렁이의 불행한 삶에 대한 짧은 연구"
이 책은 소외받는 지렁이의 삶을 다채로운 일러스트 그림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지렁이는 보통 징그럽거나 무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지곤 한다. 나 역시 길을 걷다가 지렁이를 마주하면 깜짝 놀라 돌아가고는 했다. 이 책에서는 지렁이를 갈색을 띠는 비호감 동물이 아닌, 예쁜 핑크색을 지닌 생명체로 조명한다. 지렁이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고자 한 노력으로 짐작된다. 작가는 이 책의 기획 의도가 지렁이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 전달은 아니라고 전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지렁이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보길 소망하며 스토리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저는 지렁이에 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건 어느 날 우연히 지렁이 몸이 두 토막이 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에요. 제 몸이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녀석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본문 발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점은 상황 별 지렁이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지렁이의 얼굴, 몸매, 표정, 소품, 옷, 신발 등의 디테일을 보면 미소가 번진다. 생존에 취약한 지렁이들의 고단한 삶에 무한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스토리텔링이 특징이다.
논문처럼 100% 사실에 기반한 내용을 기대한다면, 엥?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심오한 내용을 쉽게 설명하며 독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일러스트를 활용해 최대한 재미있고 가볍게 표현했으나,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삶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소외된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탐구하고, 아름답게 풀어내 이를 널리 알리는 그림책을 꼭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1. 지렁이에게는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어요. 뾰족한 가시도, 날카로운 이빨도, 따끔한 독침도, 커다란 집게발도, 추위를 막아 줄 털도, 몸을 숨길집도 없어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패하나 없이 그저 민둥민둥한 몸 하나로, 덜렁 태어났다. 살기 위해 태어났는데,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불리하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렁이는 무엇을 먹는가? 흙, 쓰레기, 시든 꽃, 마른 식물 뿌리, 썩은 과일이다. 결국, 대부분이 음쓰인 것이다. 흠..
2. 지렁이는 비 오는 날 땅속 집에서 여유롭게 빗소리를 듣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자연은 지렁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지렁이는 땅 위로 나와야만 한다.
비 오는 날 지렁이가 눈에 잘 띄는 것이 실제로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스토리 설정이라 하더라도,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지붕 달린 곳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일까. 정서적 안정이 보장되는 공간이라면 코딱지 만해도 충분한데. 전전 긍긍하고 있을 지렁이가 가슴 아팠다.
차라리 감각이 무뎌져 돌멩이 같았으면 좋겠다. (본문 발췌)
지렁이의 머리와 꼬리는 각각의 인격체를 지닌 인생의 동반자로 설정된다. 둘이 서로 챙겨주며 한 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나중엔 번개를 맞아 분리되어 헤어졌다. 삶이 고단한 지렁이는 '아 차라리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돌멩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나도 한때 그렇게 느꼈던 적이 있어서일까. 동질감을 느꼈다.
얼마 전, 혼자 밤 산책을 나갔다가 조명에 반짝이고 있는 흰색 돌을 발견했다. 유난히 반짝이고 하얬다.
'아 돌멩이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내 눈에 참 예뻤다.
평소 같으면 별 생각이 없었을 텐데, 그날따라 눈물이 찔끔 났다. 혼자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달까, 날 닮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집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돌멩이는 그냥 혼자 쉬고 있거나 재미있게 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며칠 뒤 생각해 보니, 유독 그날따라 울적했던 내 마음이 투영된 것 같다. 홍진경의 공부왕 찐천재 채널을 보다가, 딸 라엘이가 반려돌멩이를 데리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도 떠올랐다.
사물에 감정을 이 입안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 어렵다. 엄마의 오랜 자동차이자 나의 친구 1076과 작별할 때에도 은퇴식을 시켜줬으니 말이다.
대부분 으아악 징그럽다, 퇴치 작전 등이 주를 이뤘다. 그래도 지렁이의 안위를 걱정하고, 치열하게 사는 지렁이를 응원하는 Jude님, 오후님, Lali님의 글을 만나 반가웠다.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길에서 사는 고양이라거나 어려움에 처한 동물과 같은 연약한 존재는 꼭 지켜주고 싶다.
스토리는 물론이고 일러스트 그림의 표현력과 감성, 색채가 너무 아름다워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름은 노에미 볼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2022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잔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진행 중인 '서울형 도시 책방, 번역가의 서재' 코너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은 인기가 많아 벌써 여러 나라에서 번역본으로 출시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렁이에 대한 추억이나 해프닝이 많지는 않은 편이다. 그냥 비 온 뒤 걷다가 발견하면 헉하고 놀라서 돌아가는 정도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초딩 때 좋아했던 지렁이 젤리가 문득 떠올랐다. 굳이 지렁이 젤리를 반으로 쪼갠 뒤에, 다른 젤리에 있던 반쪽과 하나 되게 착 붙이는 걸 좋아했는데 돌이켜보니 기괴한 행동이다. 책에서 만난 핑크 지렁이 일러스트의 다양한 표정을 보니 지난날의 행동이 미안해졌다.
모처럼 특별한 책을 만난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하다.
어쩌면 내가 데려온 이 하얀 돌멩이 속 세상에서, 핑크 지렁이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일러스트 그림 및 본문 발췌 (C) 도서출판 단추, 작가 노에미 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