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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룡 Sep 28. 2024

그래서, 그는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 뿌넝숴(김연수) 감상문

그래서, 그는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뿌넝숴.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이르기 위해 화자와 여인이 입에 올린 말이다. 생과 사를 가르는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장에서 개개인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은 인지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일 터이다. 화자는 매화꽃이 땅을 아득히 뒤덮은 이미지로 자신이 겪은 가장 참혹한 전투를 다룬다. 그에게 전쟁은 시간과 숫자, 그리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서술할 수 없는 - 공유할 수 없는 경험이다. 피부에 꼭 붙어있기에 기억을 재구성하는 담화에서도 개인의 시선을 넘어설 수 없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이 없는 것과 다르다. 뿌넝숴는 빈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듯 말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단어가 아니다. 우린 뿌넝숴가 발화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닌 말할 수 없게 개인의 입을 - 화자의 본인의 입까지도 - 막기 위한 단어로 작용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null과 NaN은 모두 값이 없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들 간의 차이는 분명하다. null은 주소값이 없는 상태다. 담화에서 이 비유를 이어가자면 말할 준비와 들을 준비가 되었으나 내용물이 없는 상태이다. NaN은 Not a Number의 약자로 숫자가 나와야할 상황에 숫자가 아닌 것이 들어있는 상태다. 담화에선 목끝까지 차오르는 무엇이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NaN은 잘못된 접근을 뜻하기도 하는데 뿌넝숴의 말할 수 없음은 null이 아닌 NaN으로서 해석해야한다. 자칫하면 동문서답으로 볼 수 있는 72, 74p에서 여인과 화자의 대화는 이런 독법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읽힌다. 전쟁터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 공습을 피하기 위해 들어온 숲속에서 보이는 하현달에 대한 찬미 - 은 여인에게 접근 불가한 것이며 이로 인해 그녀는 경고문을 띄우는 것이다. 화자의 역사에 대한 비판 또한 접근 불가한 것을 강제로 훼손시켜 불러온 것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뿌넝숴로 돌아오자. 뿌넝숴가 '말할 수 없다'는 뜻이라 해서 순수하게 그들이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잘린 손가락에 대해 질문한 서술자(인터뷰를 진행하는 소설가)를 붙잡고 12페이지 분량의 넋두리를 이어가는 사람이 전쟁에 대해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분명 null이 아닌 NaN을 띄움으로써 전쟁에 참여한 개인을 말하고 있다. 접근 불가함이란 특성은 그자체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설명한다. 경고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예외 처리가 그 문구를 불러왔는지 파악해야 한다. 여인과 화자는 각기 다른 부분에서 말하기를 거부한다. 여인은 무엇이든 전쟁을 긍정할 우려가 있는 말하기에 거부한다 - 때론, 남성들의 검지와 중지처럼 중립적임에도 사격을 연상시키는 것이 일상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화자는 여인과 다르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격전에 전율하는 것을 여성의 물욕과 비교하며 사내의 보편성으로 내세운다. 여인에겐 수혈로도 살리지 못한 전사자들이 고통이었다면 화자에겐 전후 잘린 손가락으로 받은 멸시였다. 그렇기에 그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 자신의 후일담 - 징병되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연결하여 판단하는 것이었다.


             1950년의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린 알 수 없는가. 알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엔 크나큰 벽이 있다. 역사로 알 수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있다. 세계가 공유하는 그레고리력에 따른 시간축의 어느 지점에서, 밀러원통도법으로 그린 도표의 어떤 영역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는가. 그러나 이런 멸균 접근만으로도 미생물 같은 개인들의 담화는 박멸된다. 라캉의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를 변용하면 내가 말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거리낌 없이 묘사할 수 있는 곳엔 그 누구도 있지 않다. 전쟁을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규격화 된 것으로 포착하는 역사엔 어떤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말하기는 재난 앞에서 붕괴되고 만다. 언어는 합의된 혹은, 합의될 여지가 있는 청자가 있어야만 말하기로 작용하나 담화를 위한 공간을 파괴하고 마는 사건 앞에서 언어는 각기 다른 접근불가함 외에는 축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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