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기억나는 건 누나 손 꼭 잡고 비 홀딱 맞으며 문도 안 열어주는 남의 집 앞에 서 있던 기억. 테레비 볼 요량으로 서 있었는데 끝까지 문을 안 열어 줘서 오기로 더 기다렸던 거 같다. 정확히 말하믄 난 기억에 없는데 엄마가 하도 얘기해서리 엄마 기억의 재현이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듯싶다. 근데 요게 묘하게 낭만적이다. 거기다가 결말이 꽤 괜찮다. 아버지가 그걸 봤는지 얘길 들었는지 썅 열받아서 테레비를 그날로 사 오셨다. 쌩 월부로 대책 없이 말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동네 사람들 아무 때나 다 와서 보라 하셨단다. 아버지의 테레비 인심은 온양에 내려와서까지 이어졌다.
여섯 살 때 온양에 왔다. 이삿짐은 전축 하나랑 그 테레비 그리고 이불이랑 숟가락 냄비가 전부였다고 한다. 전축 얘길 하믄, 아버진 어렸을 적 초가단칸방은 커녕산등성이에 움막 파고 사셨고 할아버지가 폐병으로 거기서 돌아가셨다. 이후 학교 바로 때려치우고 할머니를 도와 질그릇 팔러 다니시고 할머니 눈물을 많이 보아서 속 터져 자기가 돈 번다고 아이스깨끼 사다가 애들한테 팔았다 한다. 경우에 따라 주먹질로 공포 강매하시기도 해서 그때부터 소년원인지 감방인지를 다니셨다는...
이후 아버지에게 기회가 찾아왔는데 베트남전이었다.
베트남 터진 게 아버지에겐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백마부대서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모으셨다. 남들보다 적군도 열심히 죽이시고 남들보다 훨씬 오래 3년 이상을 모아 꼬박꼬박 큰아버지께 보내드렸단다. 살아 돌아가면 서정리 쪽에 땅을 사고 그 땅의 반을 팔아 아가씨집사장님이 되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말이다. 싹수가 없는 계획 이어서인지 큰 아버지가 땅 사기를 맞아 3년 목숨담보는 물거품이 되었다 (사기의 전후사정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큰아버지의 결정적 실수가 있었던건 분명하다). 이후 간간히 아버지랑 큰아버지랑 이해 못 할 폭력들이 오갔는데 나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어. 맞어. 전축!
베트남서 전리품으로 유일하게 가져오신 것이 무식하게 생긴 바로 그 전축이었던게다. 결국 그것이 우리 집 보물 1호, 열받아서 가져온 테레비가 보물 2호가 되시겠다.
온양 풍기리의 전원 풍경은 내 정서 밑바닥의 근원이다. 묘하다. 난 음악 들을 때 몇 가지 노스탤지어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그 하나가 내 여섯 살 풍기리의 풍경이다. 하늘은 맑거나 노을이 지거나이고 가끔씩 소울음소리가 부드럽게 깔리기도 하고 저녁밥 지을 때쯤 짚풀 타는 연기냄새가 구수하다.
이상한 건 현실은 처참했는데 말이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동생 민성이랑 놀다가 민성이가 각개목으로 나를 사정없이 특히 코를 집중적으로다 때려서 코뼈가 무너지고 코피가 터져 피가 여기저기 낭자한데 그걸 큰어머니가 옆에서 보시다가 "야 이놈아 형을 때리면 어떡켜~~" 하면서 슬슬민성이를 말리시며 입가에 불쑥불쑥 미소를 참는걸 어떤 아줌니가 보고 우리 엄마한테 밀고하셨단다.
아마도 큰 엄니는 두 살이나 어린 막내아들이 나를 이기는 게 한편으론 뿌듯하셨던 모양이다.
엄마는 뭐라고 가서 따지지도 못하시고 끙끙 마음 앓이만 하셨던 거 같다. 왜냐하면 방세를 낼 형편이 안 돼 큰 집에서 머물러야 했거나 아님 그래도 가끔씩 농사짓는 큰집이 쌀이라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아~이 사건으로 인해 옆집 천 원짜리 단칸방으로 이사했다는 거 같기도 하다. 여름 장마에 방 사방에서 물이 떨어져 우리 셋만 가운데 이불 펴 자게 하고 엄마아버지는 비 맞으며 주무셨다는 전설의 그 방. 암튼 이 기회에 사건의 전후를 엄마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나의 풍기리 수난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비 오는 날 리어카 태워준다고 동내형이 가자 해서 탔다가 전복이 됐다. 그 안에 시퍼렇게 잘 갈린 낫 한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고 눈을 뜨니 엄마가 옆에서 울고 계셨다. 이후 10cm 넘는 상처가 내 왼쪽 앞머리에 남아있는데 생명과 바꾼 상처가 되시겠다. 군대에서 이 생명의 상처를 볼모로 '하이바'라고놀려댔던...
얘기 나온 김에 풍기리의 현실적인 현실은 나의 첫 학교 생활에 까지 어어졌는데 잘 들으면 내가 왜 이후 공부를 못했는지 충분히 설명되는 대목이라 자부할 수 있다. 장두환 선생님이셨다. 유독 대머리가 아름다우신 분이셨는데 기억을 억지로다가 더듬어보면 난 1학년때 공부를 잘했다. 글쓰기, 말하기, 산수, 노래, 미술, 거기다 대답도 똘망 똘망하니 잘했다. 고로 대부분 100점이나 그 언저리 시험지를 엄마에게 가져왔단다. 옆집 아이들에 비해서도 확실히 두각을 나타냈었는데 결과적으로 학년말 반에서 다섯 명이나 받는 우수상을 못 받았다. 나보다 확실히 못하는 동네 아이가 받았기에 의구심은 커졌고아버지랑 엄마랑 하는 얘기를 그 어린 나이에 듣고 말았다.
다들 예상하겠지만 돈이었다. 촌지를 안 드렸기 때문이다. 촌지란 단어가 뭔지도 모르실 부모님이었고 누가 알려줬다 해도 어찌할 도리도 없으셨을 거다.